서승완 유메타랩 대표
초한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한신이라는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유방을 도와 항우를 무너뜨리고 한나라를 세운 최고의 명장, 그러나 천하가 평정되자 오히려 그 유방의 손에 죽임을 당한 비운의 공신이다. 그 한신이 죽기 전에 남겼다는 말이 있다.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고, 높이 나는 새가 잡히면 좋은 활을 거둔다. 우리는 이 말을 '토사구팽'이라 부르며, 쓸모가 다하자 버려진 사람의 억울함을 가리키는 말로 쓴다.
그런데 이 말에는 잘 이야기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이 말이 역사가 내린 판결이 아니라, 죽는 사람이 자기 입으로 남긴 마지막 변론이라는 점이다. 붙들려 죽어가는 자가 스스로를 충직한 개라 부르며 세상을 원망한 말. 우리는 그 변론을, 오랫동안 그 말의 유일한 정의인양 내뱉어왔다.
한신이 정말 억울하기만 했는지는 따져볼 여지가 많다. 초와 한이 서로의 숨통을 조이던 전장, 유방이 지원군 하나가 아쉬워 궁지에 몰려 있을 때, 한신은 유방에게 제나라 왕자리를 요구했다. 도움을 청하는 군주에게 가장 다급한 순간을 골라 지분을 요구한 셈이다. 이후 한 책사가 그를 찾아와 유방에게서의 독립을 권했을 때, 한신에게는 분명 그럴 힘이 있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러나 힘을 다 잃고 강등된 뒤에는, 도리어 반란에 가담하려 했다는 기록이 남았다.
그의 진짜 문제는 순서가 뒤집혀 있었다는 데에 있다. 힘을 쥐었을 때는 의리를 말했고, 힘을 잃은 뒤에야 딴 마음을 품었다. 결국 그를 벤 것은 남의 배신이라기보다, 스스로가 만든 자리였다. 하지만 죽는 순간의 그는 자기를 버린 세상을 탓했다. 나는 충직한 개였다고.
여기서 한신을 탓하기는 쉽지만, 이 한신의 한탄은 정확히 우리들 자신을 겨냥한다. 필자 자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무언가 잘 풀리지 않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문장은 언제나 '내가 뭘 잘못했나'가 아니라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였다. 억울함은 빠르고 편안하게 도착하는 감정이다. 나를 아프게 들여다볼 필요 없이, 화살을 밖으로 돌려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누구나 마음속에 삶긴 개가 한 마리쯤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짖으며,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 개가.
그 개의 목소리가 위험한 건, 틀려서가 아니라 너무 그럴듯해서다. 실제로 세상은 야박하고, 배신은 존재하며, 억울하게 버려지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그래서 '당했다'는 이야기는 언제나 얼마간의 사실이다. 하지만 그 얼마간의 사실이, 나머지 진실을 통째로 덮어버릴 때 문제가 된다. 한신의 유언이 그랬다. 그 안에도 진실은 있었다. 유방은 실제로 그를 견제했고 끝내 살려두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 진실은, 전장에서 왕관을 요구하던 자신과, 힘을 잃고서야 딴 마음을 품던 자신을 가려주는 커튼이 되었다.
그렇다고 억울함을 느끼는 자신을 다그치라는 말은 아니다. 문제는 억울함 그 자체가 아니라, 억울함에서 멈춰 서는 데 있다. 세상을 탓하는 마음과 내 몫을 헤아리는 마음은 원래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인데, 삶긴 개는 앞의 것만 짖고 뒤의 것은 삼킨다.
그래서 이 오래된 이야기가 남기는 것은, 누구를 미워하라는 교훈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들을 향한 물음이다. 언젠가 필자 역시 무언가를 잃고 "당했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필자는 삶긴 개의 유언을 떠올리려 한다. 그리고 세상을 탓하기 전에, 조용히 한 번은 물어보려 한다. 나는 어디에서, 이 판을 내 손으로 깔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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