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보라 소설가
번역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외국어부터 떠오른다. 영어를, 일본어를, 불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일.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종류의 번역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언어를 번역하는 시간보다 사람을 번역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법이다.
누군가 "괜찮아"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 말이 정말 괜찮다는 뜻인지, 괜찮은 척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또 "나 오늘은 바빠"라는 문장을 들으면 정말 일이 많은 것인지, 만나기 싫다는 뜻인지 해석하려 든다. 우리는 짧은 이모티콘 하나에도 감정을 읽어내는 사람들이니까.
이렇듯 우리는 타인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번역하며 살아가고 있다.
문학 역시 번역의 예술이다.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감정을 문장으로 번역하고, 독자는 그 문장을 오히려 자신의 경험으로 번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문장을 읽고도 누군가는 위로를 받고 누군가는 상처를 떠올린다. 번역은 독자의 수만큼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완벽한 번역은 가능할까.
어떤 감정은 끝내 언어가 되지 못한다. 이를테면 "사랑해"라는 말.
사랑한다고 말해도 사랑의 크기는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여러 종류의 단어를 찾고, 더 긴 문장을 쓰고, 때로는 침묵을 선택한다. 침묵마저 하나의 번역이 되기를 바라면서.
처음부터 우리의 관계는 번역의 실패에서 시작되지 않았는가.
나는 이해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상대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고 상대는 분명 사랑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외면으로 번역한다. 같은 말이 서로에게 다른 언어가 되는 순간, 오해가 시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계속 번역을 시도하는 걸까.
사람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이해하고 싶어 하는 존재이다. 틀릴 것임을 알면서도 상대를 추측하고, 부족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설명하려 든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언어를 통해 '애'를 쓰고 있다. 그 실패를 반복하는 일이 결국 관계가 된다는 믿음으로.
좋은 예술은 하나의 의미를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개의 해석을 허락한다. 나홍진의 '곡성'이 개봉했을 때를 떠올려보자. 누군가 의심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믿음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어쩌면 구원의 이야기일지도.
우리는 우리를 완벽하게 번역할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은 사전의 의미처럼 정의되지 않고, 삶은 순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다만 서로를 향한 번역을 멈추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조금씩 서로의 언어에 가까워질 것이다. 그리고 그 노력이야말로 우리를 조금 덜 외로운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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