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철균 경북연구원장
처음에는 언어모델(LLM)이 없어서 AI를 못한다고 했다. 언어모델이 흔해지자 GPU가 없어서 못한다고 했다. GPU 수급이 나아지자 메모리 반도체가 없어서 못한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떼돈을 벌어야 한다고 했다. 아마도 얼마 후에는 전력과 변전소가 없어서 못한다고 할 것이고 그 후엔 다시 저장장치와 냉각장치가 없어서 못한다고 할 것이다.
2024년 레오폴드 아센브레너는 그의 저서 '상황 인지(시츄에이셔널 어웨어니스)'에서 이런 사태를 예견했다. 그는 AI 스케일링(확장) 과정에서 차례로 나타나는 GPU, 메모리, 전력 등의 병목 현상 때문에 세계가 끝없이 국가 주도의 메가 프로젝트 경쟁에 휩싸인다고 보았다.
아센브레너의 예측에는 어리석고 멍청한 생각도 있었다. 그는 AI가 미국의 독점적 우위를 보장하는 기술이며 중국의 산업 스파이 행위를 봉쇄해서 자유세계의 우위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기술이란 열심히 공부하면 결국에는 누구나가 알 수 있는 것이다. 99퍼센트의 연구 결과들이 공개되고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공유된다. 전 세계에 흩어진 연구자들의 '성실하게 보낸 하루하루'가 모여 성과물이 만들어진다. 이것을 어느 한 나라가 독점할 방법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이 기술을 봉쇄하자 중국은 즉각 "조국이 목이 졸려 죽어가고 있다, 모든 연구자는 조국의 생존을 위해 복무하라(爲祖國的生存服務)"고 호소했다. AI 산업에 대한 국민 총동원령, '신형 거국 체제'가 발동되었다.
그러자 '국민'이라는 민중의 바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사를 움직이는 진정한 힘,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열정이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표면에 보인 것은 아센브레너가 말한 국가 주도의 메가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그 심층에 존재한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해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평범한 국민들이었다. 세계사에서 돈 때문에 싸우는 용병군이 국민개병제의 국민군을 이긴 사례는 단 한 번도 없다.
엔비디아 GPU 수입이 불가능해지자 선전 화창베이의 노동자들이 쓰레기장을 뒤져 폐기된 GPU를 모았다. 입력선 16개, 출력선 16개를 연결해보고 살릴 수 있는 놈에다가 메모리를 24개씩 붙여 재생한 '괴물 GPU'를 만들었다. 반도체 노광에 필요한 극자외선 노광기(EUV) 수입이 불가능해지자 허베이 창신메모리의 기술자들이 멀티 패터닝을 감행했다. 공정의 복잡도가 엄청나게 높아지는 고통을 감수하고 저성능의 심자외선 노광기(DUV)로 노광과 식각을 수십 번 반복해 메모리 반도체를 만들었다. 이런 식의 봉쇄 돌파가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
중국과 미국의 처지는 역전되었다. 미국 AI는 아직도 조금 더 우수하다. 그러나 그것은 소스 코드에 접근할 수 없고, 미세조정을 할 수 없으며 토큰값이 너무 비싸다. 민간 시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관수용 납품업자나 투자받은 돈을 가볍게 생각하는 법카 루팡들만 미국 AI로 사업을 한다. 2026년 3월 현재 만약 중국 AI를 쓰지 못하게 된다면 미국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의 80퍼센트는 문을 닫아야 한다. (앤드리슨 호로위츠 조사) 중국 AI 기술의 최신 성과는 레딧 미국 개발자 커뮤니티의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주제다.
아센브레너의 말처럼 AI 자본주의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기업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병목의 난제들이 너무 많다. 그런 난제들은 국가 단위의 정책 결정이 있어야 돌파할 수 있다. 많은 국가들이 국민에게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고 기금을 만들어 기업을 지원한다. 그러나 국가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결정적인 경쟁력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 관찰력을 발휘해 자신의 일을 응시하고 자기 몫의 역할을 하는 국민 개개인에게서 나온다. 마지막에는 시장 경쟁이 승자를 선발하고 패자를 퇴출시킨다.
한국에서도 6월 29일 3대 메가 프로젝트가 발표되었다. 서남권의 반도체 팹, 충청 강원권의 AI 데이터 센터, 동남권의 피지컬 AI라는 정리가 이루어졌다. 반도체 팹과 AI 데이터센터가 산업의 스타트 라인이라면 가장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하는 산업의 엔드 라인은 피지컬 AI이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국가가 프로젝트의 국민적 이상을 제시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국민은 돈만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국가가 AI 총동원을 유도할 계기가 도박판처럼 변해버린 증시 외에 아무것도 없다면 프로젝트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일찍이 한국은 후발 공업국이 첨단 산업에서 선진국과 정면 승부하여 '추격 후 추월'할 수 있다는 것을 최초로 증명한 나라, 개념 실증(Proof of Concept)의 주인공이었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싱가포르의 리콴유도 없었고, 중국의 덩샤오핑도 없었다. 그 시절 한국에는 돈을 넘어선 이상, 생생한 별빛 같은 희망, 날카롭게 벼려진 칼 같은 희망이 존재하고 있었다. 조국의 생존을 위해 복무하라는 중국의 기술 굴기는 과거 한국 국민들이 만들었던 박정희 모델의 역습이다.
피지컬 AI에서 진정한 힘을 가진 사람들은 휴머노이드 로봇을 만든다는 공학자, 독자적 파운데이션 모델을 만든다는 개발자가 아니다. 지방의 작은 제조업 공장에서 작은 얼굴을 하고 알고리즘이 실제로 기계를 움직일 때 발생하는 문제들을 관찰하고 있는 노동자이다.
피지컬 AI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노동자가 자신의 행동에 의미와 보람을 느끼면서 자신이 관찰한 제조 데이터를 AI에 학습시켜야 한다. 디지털 전환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국의 제조업 공장들은 데이터가 자산화되지 못했다. 데이터를 모을 그때의 일회적 용도를 위해 수치만 잔뜩 모아놓았을 뿐 그 수치의 의미는 누락되어 있다. 어느 서버 어느 폴더에서 잠자고 있는 수치의 파일들에는 AI가 해석할 맥락이 부여되지 않고 있다.
피지컬 AI는 작은 얼굴의 평범한 국민들이 데이터들의 맥락,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연결성, 결과물이 양품인지 불량품인지에 대한 정보들을 AI에게 학습시키는 아주 작은 행동에서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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