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대구 남구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서 만난 피오트르 즈비에르스키는 "작품에는 인물과 자연, 다양한 장소가 등장하지만 이를 초상이나 다큐멘터리 등 특정 장르로 구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권혁준기자
피오트르 즈비에르스키 작. 권혁준기자
피오트르 즈비에르스키 작.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제공.
피오트르 즈비에르스키 작.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제공.
전시장 한쪽 벽면에 사진과 함께 검은 선이 그어져 있다. 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편지처럼 써 내려간 작가의 개인적인 메모가 눈에 들어온다. 사진과 글을 찬찬히 살피는 동안 관람객은 작가가 포착한 순간을 마주한다.
폴란드 사진가 피오트르 즈비에르스키의 한국 첫 개인전 'Solid Maze: 견고한 미로'가 오는 10월24일까지 대구 남구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20여 년간 이어온 사진 작업을 바탕으로 기억과 시간, 감정이 얽히는 과정을 펼쳐 보인다. 2024년 출간한 동명의 사진집을 전시 공간으로 옮겼다. 사진집에는 300점 이상의 사진이 160페이지에 걸쳐 수록돼 있다.
이번 프로젝트는 팬데믹 무렵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아프리카와 시베리아 등을 여행하던 작가는 이동을 멈추고 그동안의 작업을 다시 들여다봤다. 미공개 이미지와 최근 작업을 살피고, 중요한 순간을 이해하기 위한 메모도 남겼다.
다만 작가는 팬데믹이 작품의 성격을 바꿨다는 해석에는 거리를 뒀다. 그는 "어느 때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며 대범한 사진을 찍고, 또 어느 때는 자연을 많이 찍는 시기가 온다. 하나의 원처럼 순환하는 것"이라며 "팬데믹 자체보다는 이 사진 작업을 하고 책을 만드는 과정이 나를 변화시켰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전시 제목의 '견고한'은 물질적인 단단함보다 꾸준하고 지속적이며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에 가깝다. 사진에 담긴 순간과 촬영하지 않았지만 마음에 남은 순간들이 이어지며 미로를 이룬다.
벽면의 검은 선은 그리스 신화에서 미궁을 빠져나오도록 이끄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집에 쓰인 선과 글씨를 전시 공간으로 확장한 것이지만, 사진들을 시간순으로 잇거나 하나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즈비에르스키는 "사람들은 보통 시간을 과거에서 미래로, 원인에서 결과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사계절처럼 원형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며 "하지만 여러 섬이 떠 있는 것처럼 시간은 선형적인 것도 원형적인 것도 아니라 동시에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 이미지들도 그런 식으로 연결되기보다 그저 존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폴라로이드 사진을 공중에 매단 설치도 이러한 시간관을 보여준다. 관람객이 사진의 정면뿐 아니라 뒷면과 옆면까지 살필 수 있도록 구성했다. 그는 "사진이 시간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을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3차원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품에는 인물과 자연, 다양한 장소가 등장하지만 작가는 이를 초상이나 다큐멘터리 등 특정 장르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을 촬영했을 뿐"이라며 "여행 역시 이국적인 풍경이나 소수민족을 촬영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한 여행에서의 만남이 다음 여행으로 이어지고, 흥미로운 것을 따라간 결과"라고 말했다.
작가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진에 담긴 대상만이 아니라 이를 마주한 관람객의 감각이다. 그는 "내 작업을 이해하려면 이미지 안에 있는 것뿐 아니라 그 바깥에 있는 것까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며 "사진에 무엇이 보이는가보다 관람자가 어떻게 느끼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일상을 살다가 데자뷔나 위화감처럼 갑자기 이상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내 작품은 그런 순간에 내가 느낀 것을 촬영한 것"이라며 "대구 관람객들이 전시에 와서 자신에게 있었던 그런 순간들을 한번 생각해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권혁준
영남일보 권혁준 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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