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인터뷰] 700년 맥 이어온 고려의 숨결… 거조사 법타 스님이 깨운 ‘오백나한’의 미소

  • 남정해
  • |
  • 입력 2026-10-31 16:02  |  발행일 2026-10-31
영천 은해사 말사 거조사 주지 중화 법타 스님의 ‘문화 선양과 평화 통일’ 원력
“오백나한대제 유네스코 등재노력… 한국 불교 세계화는 역사적 대사”
오백나한대제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나머지 인생 바치겠다고 인터뷰를 하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 말사 거조사 주지 중화 법타스. 남정해 기자

오백나한대제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나머지 인생 바치겠다고 인터뷰를 하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 말사 거조사 주지 중화 법타스. 남정해 기자

고려시대 국가 주도의 대규모 축제였던 장엄한 문화적 의례의 맥이 700년 만에 복원되어 되살아났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 말사인 거조사에서 지난 25일 오전 영산전(국보 제14호)에서 '만중생의 평안을 위한 오백나한대재 및 만발공양'을 거행했다.


나한대재는 깊은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고려 명종 20년(1190년) 보조국사 지눌이 이곳에서 정혜결사를 개창하고 나한대도량을 개설한 것이 시초다. 이후 고려 우왕 1년(1375년)에는 나라에서 주도하여 현재 국보 제14호로 지정된 목조건축물인 영산전을 창건했으며, 당시에 오백성중을 모시고 '헌공대제'를 대대적으로 봉행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날 도량에는 전국에서 운집한 500여 명의 스님과 신도들이 참배 행렬을 이루며 가을 산사를 장엄하게 물들였다. 신도들이 나한상 앞에 놓인 500여 개의 바루(발우)에 쌀과 과일, 차 등을 올리며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풍경은 그 자체로 유구한 불교 전통 문화의 귀환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행사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영산전 앞마당에서 만난 거조사 주지 중화 법타 대종사는 화려한 가사 장삼 대신 수수한 승복 차림으로 나타나 찻잔을 건넸다.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야전사령관의 기세가 느껴지지만, 건네는 첫인사에는 민초들의 아픔을 달래온 수행자 특유의 담백한 서정이 짙게 묻어났다. 스님에게 이 도량은 고려 말 무신정권의 몰락 이후 축소되었던 국가적 대축제의 격을 온전히 회복해 내는 역사적 공간이다.


거조사 영산전에서  만중생의 평안을 위한 오백나한대재 및 만발공양을 봉행하는 장면. 남정해 기자

거조사 영산전에서 '만중생의 평안을 위한 오백나한대재 및 만발공양'을 봉행하는 장면. 남정해 기자

◆ 고려시대 국가 축제의 귀환… "700년 동안 면면히 전승되어 온 역사"


"이번 오백나한대재와 만발공양을 두고 많은 이들이 '700년 만의 재현'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오백나한재라는 신앙과 전통 의식 자체가 완전히 단절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고려 우왕 1년(1375년)에 조정이 주도하여 온 나라의 축제로 성대하고 장엄하게 봉행하던 대규모 국가 의례의 형태가, 조선시대의 억불 정책을 거치며 사찰 내부에서 스님들이 소규모로 맥을 잇는 산문(山門) 내부의 전통으로 축소되어 전승되어 왔던 것이지요."


거조사에서 은해사 성로 주지스님을 비롯한 500여명의 신도가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나한의식을 올리고 있다. 남정해 기자

거조사에서 은해사 성로 주지스님을 비롯한 500여명의 신도가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나한의식을 올리고 있다. 남정해 기자

법타 스님은 나직하지만 확고한 어조로 역사를 짚었다. 스님이 설명하는 '단절'의 본뜻은 신앙의 소멸이 아닌 국가적 대축제로서의 규모와 장엄함의 중단이었다. 이번 대재는 고려 명종 20년(1190년)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정혜결사를 개창하고 개설한 '나한대도량'의 온전한 격과 문화적 장엄함을 다시 대중 앞에 복원해 낸 역사적인 자리다.


"거조사의 나한대제는 깊은 역사적 배경과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산전 앞마당에서 온 국민과 사부대중이 함께 소통하던 문화적 장엄함의 맥을 복원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 지역사회와 불교계가 함께 고민하고 깨워내야 할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 "단 하나의 표정도 같지 않은 526위 나한, 민초들의 생생한 자화상"


거조사 영산전 내부를 가득 채운 526위 석조 나한상들의 장엄한 모습. 단 하나의 표정도 같은 것이 없이 인간의 희로애락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남정해 기자

거조사 영산전 내부를 가득 채운 526위 석조 나한상들의 장엄한 모습. 단 하나의 표정도 같은 것이 없이 인간의 희로애락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남정해 기자

학계와 미술사학계가 거조사 오백나한상에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526위의 얼굴 표정과 자세가 단 하나도 같지 않고 제각기 다르다는 점에 있다. 국내 대다수 나한상이 흙이나 나무로 만든 소조상인 반면, 거조사 나한상은 무게 30~50kg에 달하는 희귀한 석조상이다. 조선 순조 5년(1805년) 운부암의 영파 성규 스님이 과거 고려 말 조선 초 무학대사가 북한 안변 석왕사에서 500나한 예불을 지낸 근거를 바탕으로 각 나한의 이름(존명)을 일일이 고증해 표를 달아놓았다.


"과거 일부 나한상이 도난당하는 가슴 아픈 풍상도 겪었으나, 일곱 분의 나한상을 기적적으로 모두 되찾아 현재 526위의 전위가 단 하나도 유실되지 않고 완벽히 보존된 국내 유일의 도량입니다. 이 나한상들은 천진난만한 아이의 미소부터 주름진 노인의 해학적인 표정까지 인간의 희로애락을 그대로 담아냈습니다. 정형화된 형식을 벗어나 민초들의 삶을 투영한 최고 수준의 종교 미술입니다. 예로부터 '아무리 어리석은 중생이라도 사흘간 정성껏 기도를 올리면 반드시 한 가지 소원은 성취한다'는 영험한 구전이 내려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행사의 핵심인 만발공양(萬鉢供養)은 나한상 앞에 놓인 500여 개의 바루에 신도들이 직접 공양물을 올리는 장엄한 의식이다. 향, 등, 꽃, 차, 과일, 쌀을 올리는 불교 전통의 '육법공양' 정신을 계승한 만발공양은, 중생의 스승으로서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응공)인 나한을 통해 모든 중생이 배부르고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자비의 실천이다. 거조사 측은 이번 공양을 통해 모인 쌀과 보시금 전액을 지역 내 소외계층과 군부대, 복지시설에 기부하며 사회적 회향을 몸소 증명했다.


◆ "통일은 밥이다"… 황해남도 성불사에 설립한 금강 국수공장 일화


이야기가 만발공양의 '나눔'에 이르자, 스님의 시선은 절 울타리를 넘어 남북 분단의 늘어진 그늘로 향했다. 지난 30년간 100여 차례 방북하며 남북 교류에 앞장서 온 법타 스님에게 평화와 통일은 관념적인 구호가 아닌 실천적인 생명 구제였다.


"나에게 '통일은 밥'입니다. 배고픈 중생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이 불교의 가장 큰 구제이자 자비입니다. 북한은 불교를 서산·사명대사와 연계된 역사적 애국 종교로 존중하므로, 불교계가 남북 관계 회복과 민족 고통의 고리를 끊는 핵심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스님은 과거 황해남도 성불사 근거지에 '금강 국수공장'을 직접 설립해 하루 7,700명분의 국수를 무상으로 지원했던 역사적 일화를 소개했다. 북한의 극심한 전력난을 고려하여 전기 자동화 설비뿐만 아니라 정전 시에도 가동할 수 있는 수동식 설비를 겸비하도록 특수 설계한 공장이었다. 부품이 고장 나면 현지에서 즉시 깎아서 수리해 쓸 수 있도록 조치하여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인도적 교류의 온기를 전했다. 스님은 이번 대재에서도 평화 통일의 염원을 담은 북한 불교 사찰 사진 40여 점을 누각에 걸어 대중에게 최초로 공개했다.


오백나한대재와 함께 최초로 개최된 북한 불교 사찰 사진전. 법타 스님이 지난 30년간 100여 차례 방북하며 직접 기록한 평화와 자비의 현장 사진들이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남정해 기자

오백나한대재와 함께 최초로 개최된 '북한 불교 사찰 사진전'. 법타 스님이 지난 30년간 100여 차례 방북하며 직접 기록한 평화와 자비의 현장 사진들이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남정해 기자

북한 불교 사찰 사진전 중  2000년 10월 10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당시 북한  김영남 상임위원장 접견 장면도 있다. 남정해 기자

'북한 불교 사찰 사진전' 중 2000년 10월 10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당시 북한 김영남 상임위원장 접견 장면도 있다. 남정해 기자

◆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 등재라는 최대 숙원을 향해


현재 법타 스님은 영천시, 은해사와 합심하여 거조사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이는 역사에 '사람과 평화를 귀하게 여긴 수행자'로 기억되고 싶은 스님의 남은 평생의 최대 숙원사업이다.


"유네스코 등재는 단순히 외형적 성과나 유치 규모에 연연하는 것이 아닙니다. 700년 동안 이 땅의 민초들이 지켜온 정신적 자산과 예술 가치를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으로 격상시키기 위함입니다. 지난해 영천시의 발주로 경북문화재연구원에서 1년간 정밀 학술 조사를 완료해 보고서를 정식 채택했습니다. 526위 나한상 전체를 상·하·좌·우·정면 등 8면 체계로 전수 촬영하여 독보적인 디지털 데이터베이스 고증 성과도 냈습니다. 이 소중한 고증 자료를 바탕으로 거조사의 세계적 가치를 널리 알리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으로 격상시키는 데 남은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차가운 돌나한의 얼굴마다 수행자의 따뜻한 온기를 채워 넣으며, 역사적 가치 규명과 보존을 최우선으로 삼아 사부대중의 뜻을 모아 장엄하게 한 걸음씩 나아가겠다는 법타 스님의 원력은 거조사의 유구한 지붕 위와 대중의 마음속에서 이미 푸른 하늘 한 조각처럼 영글어가고 있다.



기자 이미지

남정해

영남의 내일을 열고 심장을 뛰게 할 뉴스를 만들겠습니다.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사회인기뉴스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