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TBC대구방송의 인기 로컬 프로그램 ‘싱싱 고향별곡’의 진행자 한기웅씨(오른쪽)와 천단비양이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옛 이야기 지즐대던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도시민에게 고향은 언제나 그리움이고 안타까움이다. 그런 고향의 소식과 이야기를 매주 토요일 오전 7시40분 지역민에게 감동 깊게 전해주는 TV프로그램이 있다.
‘싱싱 고향별곡.’(이하 싱싱)
싱싱은 TBC 대구방송의 간판 로컬프로그램이다. 올해로 5년째를 맞은 싱싱은 대구·경북지역의 어르신들을 TV 앞으로 끌어들이며, 기상시간과 식사시간 등 생활패턴까지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청률조사회사 TNmS 멀티미디어에 따르면 지난 21일 방송된 싱싱은 시청률 16.0%, 점유율 40.6%를 기록해 같은 날 방송된 MBC의 인기프로그램 무한도전(14.4%)을 넘어섰다.
싱싱이 인기 장수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뭘까. 이는 청춘을 바쳐 일군 터전을 젊은 세대에게 내어주고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던 노인층을 다시 한 번 무대의 주인공으로 끌어냈다는 점 때문이다. 또한 어르신의 구수한 입담과 트로트가락이 어우러지면서 도시민에게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두 MC의 재치 있고 매끄러운 진행, 스태프의 열정과 회사의 지원이 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2008년 5월 첫 전파를 탄 이래 지금까지 싱싱 고향별곡이 만난 마을은 250여곳, 만난 사람들만 해도 1만여명이 넘는다. 대구·경북지역 23개 시·군은 물론, 동포가 많이 살고 있는 일본의 사할린, 중국의 만주지역까지 찾아 그들의 삶과 애환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싱싱이 찾는 곳은 군·면 단위가 아니라 마을 단위다. 이는 싱싱의 주인공이자 주시청자가 방송 소외계층인 농어촌 어르신이기 때문이다. 싱싱은 사실 대구방송의 ‘내 고향 만세’ ‘떴다 우리 동네’의 후속프로그램이었다. 이 두 프로그램은 경북지역의 한 마을과 전라도의 한 마을을 이어주는 프로그램으로 두지역의 어르신이 출연해 노래자랑을 하고 특산물도 소개했다. 그러나 두 프로그램은 종방되고 싱싱만이 남아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 ‘북쟁이 아재’ 기웅
소년가장 출신 배우, 대구의 강호동 불리어
녹화중 어려운 아이에 몰래 용돈 주기도
“처음엔 튀려고 오버…의도된 사투리 힘들어
표정없이 운명 말하던조선족 할머니 못잊어”
◇ ‘저고리 조카’ 단비
중2 때 음반 낸 신동 현재 연 80차례 공연
어르신의 우상이자 친손녀같은 존재 각인
‘단비 보니 여한없다’ 녹화중 몰려와 눈물도
“친구와 얘기하다보면 애늙은이 취급받아요”
◆ 기웅 아재
첫회부터 싱싱과 함께한 MC 한기웅씨(44)는 유랑가객 ‘기웅 아재’나 ‘북쟁이’로 통한다. 늘 북을 메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는 “싱싱이 유식한 척, 잘난 척 하지 않고 우리 부모님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표현하기 때문에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한씨는 온누리 극단 출신의 연극배우다. 그는 2005년 대구방송 개국과 함께 동고동락해 왔다. 그가 싱싱을 맡은 계기는 TBC개국 드라마 ‘아빠는 못 말려’에 출연한 친구 덕택이다. 우연한 기회에 친구가 한씨에게 “네가 하면 정말 잘 할 것 같다”고 추천해 진행하게 됐다.
그는 “싱싱이 사투리를 쓰는 프로그램이라서 처음에는 사투리를 담아내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잠깐 하고 말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오래 할 줄 몰랐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인기에 대해 그렇게 연연해하지 않는다.
“인기라는 거 생각하지 말자고 늘 다짐합니다. 내 능력과 재능으로 세상에 보답할 게 무얼까. 방송을 하면서 늘 주변 분에게 고맙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한씨는 소년가장 출신이다. 17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외할머니, 동생 2명과 함께 집안을 꾸려나갔다. 그는 “남들보다 일찍 철이 든 편”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래서 시골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면 남이라는 생각보다 자신의 부모와도 같다고 생각한다.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어르신을 보면 유관순 누나나 이순신 장군만큼 대단한 분입니다. 최선을 다해 자식을 키운 아름다운 삶, 정말 훌륭한 삶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다 유명한 사람이나 잘 난 사람만 부각하잖아요. ‘내가 이런 이야기를 누구에게 하겠노. 누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겠노’하면서 이야기를 할 때면 눈물이 날 때도 있습니다.”
대구의 강호동 또는 유재석이라 불리기도 하는 한기웅씨는 처음 방송에 출연했을 때 자신을 알리기 위해 오버액션을 하기도 했다.
“도우미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진행자가 떠들고 주도했습니다. 방송을 보면서 후회가 되더군요. 해가 갈수록 모가 난 부분이 점점 깎여진다고나 할까. 지금은 함께 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는 심정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한때 서울지역 방송국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지만 그는 한번 맺은 인연을 끝까지 이어간다는 생각으로 유혹을 뿌리쳤다.
“사실 면접을 보러가는 날이 동생 결혼식과 겹쳤어요. 동생 결혼이 우선이잖아요.”
그는 성주에서 태어나 대구로 왔다. 스스로 잔머릴 잘 쓰는 편이라고 말하지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싱싱 담당 박원달 PD는 한씨에 대해 “무슨 일이든지 몸을 사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열심히 합니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어려운 형편에 처한 가정의 아이에게 몰래 용돈도 줘요”라고 귀띔했다.
한씨는 자신의 끼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다고 말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저마다 신명을 가지고 있다고 봐요. 저는 그 신명을 가장 짧은 시간에 끄집어내는 장점이 있다고 하더군요.”
싱싱은 대본에 의지하기보다 현장의 리얼리티를 중요시한다. 진행을 할 때 임기응변이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친화력도 있어야 한다. 즉석에서 인터뷰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민초들에겐 언감생심 TV출연이 그림에 떡이다.
“우리는 가끔 어머니가, 아버지가 불러주는 이름이 그리울 때가 있잖아요. 어르신에게 노래를 시키면 처음에는 주저합니다. 끝까지 머뭇거리면 그 땐 애국가라도 부르라고 하지요. 한번은 어떤 시청자가 ‘돌아가신 아버지가 웃으며 즐겁게 노래하는 모습이 담긴 싱싱 프로그램의 테이프를 사고 싶다’고 전화가 오기도 했지요.”
한씨는 설 특집으로 중국 흑룡강성에 있던 한 조선족동포마을을 소개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추운 날씨에 고생도 엄청 많이 했지만 담배를 피우며 얼굴에 웃음도 슬픔도 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운명을 이야기하던 한 할머니가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다.
한씨는 “언제까지 싱싱이 계속 방영될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지역민에게 고향의 따뜻한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고 희망했다.
◆ 단비 처녀
‘기웅 아재’ 한씨에겐 친조카나 다름없는 조카가 하나 있다. 바로 공동 MC인 천단비양(20·영남대 국악과 2학년)이다.
단비는 어릴 때부터 ‘노래신동’이었다. TV를 보며 노래를 따라하고 춤도 곧잘 추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엄마의 권유로 지역 케이블방송사의 가요제에 참가해 입상한 이후 체계적인 연습에 돌입하며 각종 노래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단비는 달서구 용산중 2학년 때 음반을 내기까지 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대구시 남구 봉덕동에서 열린 한 어르신 위안잔치에서 트로트를 부른 게 인연이 돼 방송에까지 출연하게 됐다.
“노인정과 사회복지시설이 주최한 잔치 때 단골로 불려나가 노래를 불렀어요. 주로 ‘소양강 처녀’ ‘동백아가씨’같은 트로트였죠. 교도소에서 재소자를 위한 공연도 했습니다. 무섭기도 했지만 정말 따뜻하게 맞아주던 눈길을 잊지 못해요.”
거리에서 이름이 알려지자 대구방송은 경북예술고 1학년이던 단비를 스카우트했다. 2008년부터 단비는 ‘기웅 아재’와 싱싱에 공동 진행자로 출연하게 됐다.
“처음엔 아무 것도 모르고 아재(한기웅씨)만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재미도 있고 신도 나더군요. 그런데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재미보다 세상을 알아가는 것 같더라고요.”
또래 친구에게 왠지 엄마 같은 마음으로 이야기하다보면 ‘애늙은이 같이 잔소리 하지마라’면서 구박을 받을 때도 있단다.
한씨는 “단비가 속된 말로 요즘 아이들처럼 까지거나 싸가지가 없는 게 아니라 경우가 발라요. 저처럼 일찍 철이 든 거죠. 하하하.”
그러나 사실 단비도 어릴 적 한씨처럼 가정형편이 부유하지 않다. 그러나 전혀 내색하지 않는다. 단비는 촬영 때문에 일주일에 3일을 비워야 한다. 그래서 늘 학업을 따라가기가 벅차다.
“아재가 친구 하나는 확실히 챙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했죠. 그 친구가 늘 저에게 노트도 빌려주고 수업내용도 이야기해줘 버틴 거지요.”
단비는 또래보다 할머니·할아버지에게 우상이다. 때론 친구들이 사인을 받아가는데, 대부분 할머니·할아버지의 부탁을 받아서다.
“언젠가 한 마을에 갔는데 제 손을 잡으려고 할머니·할아버지들이 몰려오는 게 아니에요. 어떤 할머니는 ‘이제 단비님 봤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어요. 얼마나 당황했던지….”
어르신에게 단비는 친손녀 같은 존재다. 색동저고리를 입은 손녀가 구성지게 노래를 불러주니 그렇게 좋아한다.
하지만 단비에게 한씨는 선생님, 아빠, 삼촌, 친구 같은 존재다.
“아재가 옆에 계시니 편해요. 가끔 어르신의 말을 못 알아들으면 아재가 친절히 잘 설명해줘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단비는 무대체질이다. 싱싱말고도 스케줄이 빡빡하다. 각종 축제는 물론 위안잔치의 단골주인공이다. 연간 공연 횟수만도 70~80차례에 이른다.
“힘들지만 즐겁잖아요. 제가 가진 재능을 남들한테 보여줄 수 있다는 게 행복합니다.”
단비의 꿈은 국악과 교수가 되는 것이다. 어릴 때는 가수가 되고 싶었지만 점차 공부가 좋아져 꿈을 바꿨다고 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