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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팔공산 자락에 작업실을 마련해 주변의 자연물을 소재로 작업하는 서양화가 조혜연씨가 앞마당에 있는 돌탁자에 앉아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계명대 미술학과와 동 대학원 미술교육과, 미국 휘트워스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구를 비롯해 서울, 미국, 프랑스 등 국내외에서 18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단체전에도 300여회 참여했다. 2008년 대구미술대전 초대작가상을 받았다. 현재 신조회, 대구판화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그의 작품은 일본 후쿠오카시립미술관, 계명대, 대구문화예술회관 등에 소장돼 있다.
서양화가인 조혜연 계명대 교수(서양화과)는 작은 꿈 하나가 있다. 남들이 보면 배부른 소리라고 비웃을 수 있겠지만, 하루빨리 직장을 퇴직하고 작업에 몰두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작가로서 활동하기보다는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아왔습니다. 이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역량 있는 제자들이 국내 미술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 이것도 제 인생에서 큰 기쁨이지요. 하지만 내년 여름 퇴직한 이후로는 작가로서 열심히 작품활동에 매진하려고 합니다.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설렙니다.”
퇴직이 기다려지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 현재 대구에 있는 집을 팔공산의 작업실로 완전히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현재 대구의 집과 칠곡군 동명면에 있는 작업실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한지를 으깨어 캔버스 삼아 그림 작업
작품속에는 늘 자연 풍경이 자리잡아
나무만큼 사람에 도움만 주는 게 또 있을까
그는 2000년 팔공산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이에 앞서 1995년 남편이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싶다고 해 남편을 따라 시골의 한 폐교를 작업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남편의 친한 친구가 군위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그 친구와 함께 농사를 짓겠다며 군위에 텃밭을 마련했습니다. 그 전에는 학교에서 작업을 했는데, 한지를 분쇄해 작품을 제작하는 제 작업의 특성 때문에 넓은 작업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늘 했어요. 남편을 따라 군위에서 한 폐교를 빌려 제자들과 함께 작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1999년 군위교육청에서 학교를 개인에게 팔면서 조 교수는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대구 가까운 시골 마을에 있는 작업실을 지으려고 부지를 찾아 헤매던 그는 우연히 팔공산 자락에 전원주택 타운을 조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매입했다.
“군위에서 시골생활을 해보니 너무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붐비지 않고 조용해 좋았지요. 사람이 없고 조용한 곳이라야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데, 도시에서는 그런 곳을 찾기가 힘들잖아요. 당시 제 주변에서도 전원으로 들어가는 작가가 하나둘 생겨났는데, 그 이유를 알겠더군요.”
그래서 당초 작업실만 지으려던 계획을 바꿔 그곳에 집까지 함께 지었다. 하지만 그 집에서 살림할 시간적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움직임이 적어지면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
퇴직하고 나면 팔공산 작업실로 옮겨
작품활동에만 매진하고 싶은 게 소망
“대구에 있는 집을 작업실이 있는 집으로 옮기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직장인이라서 안 되더군요. 매일 팔공산에서 출퇴근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말에만 이곳에서 생활했습니다.”
학교, 대구의 집, 팔공산의 작업실을 오가며 생활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아 힘들지 않냐고 물었더니 조 교수는, “물론 힘들다. 그래도 이렇게 바쁘게 사는 것이 재미있다”고 답했다.
그는 팔공산에서의 생활을 풀과의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풀 뽑기와 나무 관리 등을 잠시라도 소홀히 하면 마당이 엉망이 됩니다. 아파트는 1~2주간 비워도 표시가 별로 나지 않는데, 시골집은 사람의 손길이 가지 않으면 금방 표시가 나지요.”
조 교수는 이런 바쁜 생활이 좋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다. 움직임이 적어지면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설명이다. 시골생활은 사람을 잠시도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드는데, 이것이 결국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고 건강까지 챙기게 해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업을 보면 그가 자연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작가는 초기 유화를 그리던 시절부터 자연풍경을 즐겨 그렸다.
지금은 한지를 으깨어 이것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리고, 판화기법을 접목시켜 찍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작품 속에는 늘 자연풍경이 자리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뒤 70년대 말과 80년대 초·중반에는 하늘, 구름, 나무 등을 추상적으로 담아낸 그림을 그렸습니다. 80년대 중반 미국 미네소타대에 연수를 갔다가 종이를 소재로 한 핸드메이드 작업에 빠져들게 됐습니다. 원래부터 종이를 좋아해 종이로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는데, 그 구체적인 방법을 찾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종이로 죽을 만들어 뜨는 작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는 종이가 가진 매력에 대해 설명을 덧붙였다. “종이는 펼치면 늘어나고, 놓으면 줄어들기도 합니다. 때로는 모습을 감추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지요. 그래서 조각과 회화, 판화 등 여러 영역으로 작업하기가 아주 좋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종이 만들기 작업과 기법의 혼합도 가능합니다. 매우 융통성 있고, 유연한 재료란 설명이지요.”
한지를 만드는 것처럼 종이죽을 떠내 만든 그의 작품에는 집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물이 소재가 된다. 이들 자연물 가운데 특히 나무가 주된 소재로 쓰인다. 나뭇가지, 나뭇잎, 꽃잎 등이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나무가 좋았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시골생활을 한 뒤 나무가 좋아진 이유를 알겠더군요. 나무만큼 사람에게 아픔을 주지 않고, 도움만 주는 것은 찾기가 힘듭니다. 동물을 키우면 쉽게 죽지요. 하지만 나무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무는 자신을 봐 달라고 요란을 떨지도 않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가만히 서 있으면서 주변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움직이지 않아 수동적인 것 같지만, 베푸는 데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도 큰 힘을 가지고 있지요.”
작품의 재료인 종이도 나무를 소재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그의 작품은 모든 것이 나무가 재료가 돼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나무와 가장 가까이에서 호흡할 수 있는 방법이 결국 전원생활이다.
조 교수는 자신의 집 마당에 특히 자작나무가 많다고 한다. 자작나무는 껍질이 하얀데, 이 껍질마저도 자신의 작품에 좋은 재료가 된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는 자신이 예술작업을 하고 있지만, 자연 자체가 예술이라고 한다. 작품을 통해 자연을 닮아가고자 하는 것이 예술의 과정이란 설명이다.
“팔공산 자락의 숲 속으로 작업실을 옮기고 나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종이로 뜨고, 만들고, 찍고, 그렸습니다. 숲을 지나는 바람, 물, 들풀은 그 자체가 예술입니다. 이것을 그냥 편하게 느끼고 어린아이 같은 손놀림으로 몰두하는 즐거움, 그 과정을 나는 사랑합니다. 그래서 작업하는 것이 좋습니다.”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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