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완 논설위원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함께 서양 정치철학의 3대 필독서로 꼽힌다. '정치학의 바이블'이란 수사가 있는가 하면, 히틀러, 무솔리니 같은 희대의 독재자가 탐독했대서 '악마의 책'으로도 불린다. '군주론'은 지금까지 수없이 읽히고 해석되고 반박당하고 숭배됐지만 정작 마키아벨리의 말년은 쓸쓸했다. 무덤조차 어디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피렌체의 마키아벨리 기념비에 새겨진 문구는 그의 존재감을 응축한다. '어떤 묘비명도 이 위대한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탈리아가 마키아벨리에 바친 곡진한 헌사(獻辭)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과 또 다른 명저 '로마사 논고'에서 일관되게 정치 지도자의 포르투나와 비르투를 조명했다. 이탈리아어 비르투(virtu)는 덕성과 능력을 의미한다. 포르투나(fortuna)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행운의 여신으로, 어원은 fortune(운)이다. 현실주의자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운과 능력이 다 필요하다"는 지론을 폈다.
이재명 대통령은 어떨까. 이재명의 포르투나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사자성어가 있다. 만절필동(萬折必東). 황하가 만 번을 굽이쳐도 물은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이다. 순자 유좌(宥坐)편에 나오는 말이다. 이 대통령의 포르투나는 극적이다. 구곡(鉤曲)과 위기로 점철된 정치역정은 결국 대선 승리로 귀결됐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반전 드라마가 펼쳐졌다. 2023년 9월 위증교사 혐의 등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 올해 3월의 공직선거법 위반 항소심 무죄 판결은 '구사일생 이재명' 서사의 명징한 장면이다. 지난해 11월 열린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1심에선 피선거권 박탈형인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고, 이후 민주당 안팎에서 대선 후보 교체론이 분출했다. 질곡의 시간은 이재명에게 시련이었을망정 불운과 좌절의 낙인을 찍진 못했다. 이 대통령의 운발을 인지한 듯,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운이 세고 성격이 밝다"고 평가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황당한 계엄을 선포해 조기 대선 판을 깔아준 것 역시 이 대통령의 대운이다. 윤석열이 인내하며 시간 싸움을 이어갔다면 12개 혐의로 5개의 재판을 받고 있던 이재명의 대권 쟁취는 백일몽으로 스러졌을 개연성이 크다.
이 대통령은 비르투도 꽤 센 편이다. 그 능력은 자치단체장 시절의 평판으로 엿볼 수 있다. 성남시장 때 시민들의 시정 만족도는 80%를 넘었고, 경기도지사 재임 땐 전국 시·도지사 평가 1위 타이틀을 달고 다녔다. 이 대통령이 구정 만족도 92%의 정원오 성동구청장을 띄워 올리자, 정 구청장은 "원조 '일잘러'(일 잘하는 사람)에게 칭찬받았다"고 화답했다.
법조인이지만 경제적 식견이 상당하고, 한 번씩 SNS에 올리는 글은 조리정연하며, 실용적 사고(思考)를 갖췄다. 문재인 정부처럼 섣불리 '탈원전'을 밀어붙이지 않는다. AI 시대의 전력 수요를 감안한 현실적 판단으로 비친다. '윤석열 검찰'의 현란한 압수수색과 전방위 수사를 버텨낸 내공도 그렇거니와 최단기간에 '친명 민주당'을 만든 수완이 남다르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취임사에서 강조했던 '통합'과 '유연한 실용주의'를 실천으로 보여주진 못한다. '노란봉투법'처럼 정책적 실용이 배척되고, '묻지마' 내란 응징으로 통합의 동력을 약화하는 국면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권의 성공 확률을 높이려면 이 대통령이 관용과 공정, 실용주의의 이데올로그가 돼야 한다. 논설위원
박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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