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甘川 百五十里를 가다 .12] 백범 김구가 월곡리에 머문 까닭은

  • 박현주 임훈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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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수정 2013-06-25  |  발행일 2013-06-25 제면
탈옥 후 달이실로 숨어든 열혈청년, ‘김구’ 새 이름을 얻다
[甘川 百五十里를 가다 .12] 백범 김구가 월곡리에 머문 까닭은
김천시 부항면 월곡리에는 백범 김구가 한 달간 머물렀다는 월곡리의 부호 성태영의 집터가 있다. 백범은 이곳에서 ‘창수’라는 본명을 버리고 ‘구’로 이름을 바꾼다.

김천시 부항면 월곡리(月谷里)의 원래 이름은 ‘달이실’이다. 달이실은 ‘달이 가득 찬 골짜기’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거북이 달을 바라보는 형상의 ‘거북바위’ 또는 ‘거빵굴’이라 불리는 큰 바위가 있어 달이실이라 불렸다고 한다.

달이실 마을은 비록 한때지만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은거지로, 김천에서 유일하게 그의 발자취가 남겨진 곳이다. 일찍이 백범의 됨됨이를 알아본 달이실의 부호 일주(一舟) 성태영(成泰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안타깝게도 성태영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꼿꼿한 선비의 기질을 간직한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1.백범, 김천 사람 성태영을 만나다

[甘川 百五十里를 가다 .12] 백범 김구가 월곡리에 머문 까닭은
월곡숲은 월곡리 주민들의 최고 휴식처다. 100여년 전 월곡리에 머문 백범 역시 이곳에서 쉬어 가며 훗날을 도모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무주 읍내에서 인삼을 재배하는 이시발(李時發)을 찾아가니 하룻밤을 묵게 하고는, 다음 날 편지 한 장을 주며 지례군(知禮郡) 천곡(川谷, 후에 김천시 부항면 월곡리가 됨)이란 동네에 있는 성태영을 찾아가라 했다. (성태영의 집은) 수청방, 상노방에 하인이 수십 명이고, 사랑에 앉은 사람들도 거의가 귀족의 풍채와 태도를 가진 자들이었다. 주인 태영이 편지를 보고 환영하여 상객으로 대우하니 상노 등이 더욱 존경하는 태도로 나를 대했다. 성태영의 자는 능하(能何)요, 호는 일주다. 그와 함께 산에 올라 나물 캐고 물가에 가서 고기 구경하는 등 여유로운 생활을 해 가며, 고금의 역사를 토론하면서 한 달여를 지냈다.”

백범 김구는 김천 달이실에서 만난 성태영과의 인연을 백범일지에 이렇게 남겼다. 백범의 나이 25세(1900년) 때의 일이었다.

백범이 김천 달이실 마을에 머문 연유는 을미사변(乙未事變)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복수를 행동으로 옮기면서부터다.

갑오개혁(1894년) 이후 노골적으로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던 일본은 1895년(고종 32) 10월8일 조선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시켜 명성황후를 시해한다.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이때 갓 20세가 된 해주청년 김창수(金昌洙, 백범의 본명)는, 동학의 접주(接主)로 해주성 공략을 지휘한 뒤 안태훈 진사(안중근 의사의 아버지)의 집에 은거하고 있었다. 일제의 만행에 분노한 백범은 남만주의 의병부대에 합류하는 등 청나라 국경을 넘나들며 시세를 살피는 중이었다. 백범이 21세가 되던 1896년 2월, 청나라로 향하던 그는 삼남에서 의병이 봉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국내에 머물기로 한다. 이후 백범은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로 발걸음을 돌린다. 치하포로 향하던 백범은 한 여관에서 수상한 사내를 만난다. 비록 한복을 입고 우리말을 썼지만 조선인으로 변장한 일본인이 분명했다. 게다가 그 사내의 품속을 살펴보니 칼까지 숨겨져 있었다.

백범은 백범일지에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어 놓았다.

“저놈이 보통 장사치나 기술자 같으면 굳이 우리 조선 사람으로 위장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우리 국모를 시해한 미우라가 아닐까? 아니더라도 공범일 것 같다. 칼을 차고 숨어 다니는 왜인이 우리 국가와 민족의 독버섯인 것은 명백한 사실인 만큼 내가 저놈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치욕을 씻겠다.”

백범은 그 일본인을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 난도질한 뒤 “국모 보수(報讐, 해를 입은 대로 해를 줌. 앙갚음)의 목적으로 이 왜인을 죽이노라(중략).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라고 밝힌 포고문을 남기고 당당하게 체포된다. 그리고 곧바로 인천감리서에 수감된다. 이때 살해된 일본인은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로 알려져 있다. 백범일지에는 당시의 일을 ‘복수의거, 치하포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건 이후 백범은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집행 직전 고종의 사면령에 의해 극적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석방의 기미가 없자 1898년 인천감리서를 탈옥하게 된다.

탈옥에 성공한 백범은 안정적인 은거지를 찾던 중 자신을 위해 구명운동에 나섰던 유완무와 그의 동지들을 만난다. 각지의 부호였던 이들은 새로운 동지가 생기면 기존 동지의 집을 은거지 삼아 1개월씩 함께 묵곤 했다. 당시 김천 출신의 성태영도 이들과 동지였다. 이들은 함께하는 동안 서로의 됨됨이를 파악한 뒤, 특정 분야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곤 했다. 백범이 1900년 김천 달이실에 있는 성태영의 집에 머물렀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김구는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능력을 키울 수 있었고, 훗날을 도모할 수 있었다.


#2.김천에서 얻은 이름 ‘김구’

자주적인 조선을 꿈꾸던 열혈청년 김창수는 김천 달이실에서 새 이름을 얻는다. 성태영과 유완무는 백범으로 하여금 ‘창수’라는 이름을 버리게 한다. 이름은 ‘김구(金龜)’로, 호는 ‘연하(蓮下)’, 자는 ‘연상(蓮上)’으로 고쳐준다.

김구(金龜)라는 이름과 연하라는 호는 1912년 9월 이름을 구(九)로, 호를 백범으로 고칠 때까지 쓰인다. 당시 성태영과 유완무는 “연하(蓮下)는 동지들이 시험한 결과, 아직 학식이 얕고 부족하니 공부를 더 하되, (공부는) 경성 방면의 동지들이 맡아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백범을 돕는다. 하지만 이 계획은 백범이 부친상을 당하는 바람에 차질을 빚는다.

[甘川 百五十里를 가다 .12] 백범 김구가 월곡리에 머문 까닭은
김천시 부항면 월곡리에 있는 거북바위. 마을의 원래 이름인 ‘달이실’은 달을 바라보는 형상의 거북바위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1970년대 도로가 새로 조성되면서 거북바위의 몸통 부분이 땅에 묻히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달이실에서의 인연으로 백범과 성태영은 각별한 사이가 된다. 백범일지에는 “(부친상을 당해) 유완무와 성태영에게 부음을 전했다. 김천을 잠시 떠나 경성(서울)에 체류 중이던 성태영은 500여리 길을 말을 타고 와 조문과 위로를 해주었다. 성태영이 며칠간 휴식한 뒤 나와 함께 구월산의 빼어난 경치를 구경하며 그간 멀리 떨어져 쌓인 회포를 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사람의 우정은 1919년 시작된 백범의 기나긴 중국 망명시절에도 계속됐다. 백범은 1929년 5월 탈고한 ‘백범일지’ 말미에 “(중국) 상해에서 듣건대(중략) 성태영은 그간 길림(吉林)에 내왕하였음으로 통신을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백범일지에 기록된 백범과 성태영의 교류는 30여년 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이는 백범의 나이 54세를 기준한 것이며, 백범이 1949년 74세에 타계한 것을 감안하면 두 사람의 교류는 훨씬 더 오래 지속됐을 가능성이 높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달이실에서 성태영이 살았던 집터 외에는 별다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집터에 세워진 ‘백범 김구 선생 은거지’라는 표지석에서 김구의 흔적을 유추할 뿐이다. 백범의 이야기 역시 관심 있는 이들에게만 전설처럼 전해질 뿐이다.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은 “성태영의 흔적을 추적했지만 구체적인 자료를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어느 때인가 대구로 이사를 했다’ ‘그의 아들이 대구에 살았다’ 정도의 이야기만 떠돌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김천=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도움말=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참고 문헌: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공동기획 : 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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