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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시 구성면 광명리에는 독립운동가 여환옥의 생가인 ‘성산여씨 하회댁’이 있다. 고택의 단아한 모습에서 대쪽 같은 선비의 기품이 느껴진다. |
마을 앞으로 감천이 흐르는 김천시 구성면 광명리에는 독립운동가 여환옥(呂煥玉, 1896~1963)의 생가인 ‘성산여씨 하회댁’이 있다. 18세기 초 성산여씨(星山呂氏)인 여명주(呂命周, 1681~?)가 60여칸 건물로 지었다고 한다. 고택은 조선후기 농민항쟁으로 불에 타 일부가 훼손됐고, 1936년 병자년 대수해로 무너져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규모가 줄었다. 하지만 단아하면서도 대쪽 같은 선비의 기품이 느껴지는 고택의 품격은 옛 김천 선비들의 품성을 대변해 주고 있다.
성산여씨 가문의 일원들은 대대로 구성면 일대에 세거지를 꾸리고 살아왔다. 특히 조선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감호(鑑湖) 여대로(呂大老, 1552~1619)와 독립운동가 여환옥이 대표적 인물이다. ‘감천 150리를 가다’ 26편은 자신의 신념을 굳게 지키고, 나라와 백성을 사랑한 구성면 출신 의인(義人)들에 관한 이야기다.
#1.◆ 대쪽 같은 성품의 선비
1552년 구성면의 성산여씨 집안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아이의 이름은 ‘대로’였는데 어렸을 때부터 그 총명함이 남달라 주위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이러한 총명함을 갖춘 덕에 여대로는 퇴계와 더불어 영남학파의 거두였던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을 수 있었다. 여대로의 부친은 늘 “우리 가문을 빛낼 아이가 바로 대로”라며 아들을 격려했고, 흡족해 마지않았다.
여대로는 그 영민함과 더불어 예의범절이 바른 것으로도 유명했다. 여대로가 여덟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상중의 예의범절이 어른에 못지않았다고 전해진다. 26세에 부친상을 당했을 때도 3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하며 자식의 도리를 다했다. 또한 계모를 모실 때에도 아침저녁 문안인사를 빠뜨리지 않을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
여대로는 1582년 사마시(생원·生員과 진사·進士 선발시험)에 합격한다. 이듬해에는 문과에 급제해 한강(寒岡) 정구(鄭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등 당대의 대학자로 성장한 동료들과 교류하며 우정을 돈독히 했다.
누가 봐도 앞길이 창창한 여대로였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답답한 면도 지니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대로에겐 한 가지의 원칙이 있었는데, 정도(正道)가 아닌 일에는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이었다. 고지식할 정도로 대쪽 같은 여대로의 성품은 이후 그가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는데 악영향을 미친다. 여대로는 출세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시기 어린 눈빛의 주변 사람들은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하지만 원칙을 고수하는 그의 행동은 평생토록 변함없었다.
여대로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마자 자신의 몸을 전장 한가운데에 내던진다. 성리학적 윤리실천이라는 선비정신은 차치하더라도, 고향을 왜적의 침략으로부터 지키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사명이었다.
이후 의병장이 된 여대로는 김면·권응성 등과 함께 지례전투에서 공을 세운다. 여대로의 병사를 비롯한 1천500명의 의병은 지례현 일대의 왜군을 무찌르는 데 성공한다. 이후 여대로는 당시 초유사(招諭使, 난리 때 조정에서 내려지는 임시벼슬)를 맡고 있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천거로 지례현감의 자리에 오른다. 전란 중 공식적인 절차 없이 오른 자리였지만, 향토를 책임지는 관리이자 의병장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1594년 가을, 명나라 군대의 군량미를 조달하는 임무를 맡은 그는 의성현령을 겸하게 되면서 지례현을 떠난다.
의성현령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는 그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전란 중 민초의 삶은 피폐하기 짝이 없었다. 온 고을이 전염병에 시름하는 백성의 신음소리로 가득찼고, 굶주린 백성들에겐 어떠한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 백성들의 고통을 차마 지켜볼 수 없구나…. 내 작은 힘이나마 이들을 위해 써야겠다.” 여대로는 자신의 봉록을 털어 백성을 구휼하는 등 목민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한다.
1607년 여대로는 합천군수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곳에서도 그의 강직함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합천군 초계면에는 당대의 세도가이자 북인의 영수였던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의 집이 있었다. 하루는 여대로가 정인홍의 집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정인홍이 의관을 갖춘 채 뛰어나와 향토민으로서 우의를 맺자고 요구한다. 하지만 여대로는 “상공이 어찌 시속에 얽매여만 있겠습니까?”라며 자리를 뜬다. 여대로에게 있어 벼슬은 군주에 충성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일일 뿐 다른 의미는 없었다. 조정의 실권자와 우호적 관계를 맺어 출세가도를 달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여대로의 인물됨과 능력이 마음에 들었던 정인홍은 포기하지 않았다. 정인홍은 여대로에게 종이와 부채를 달라는 구실로 자신과 인연을 맺길 간청한다. 하지만 여대로의 대답은 매몰찼다. 그는 “가야산 일찍 내린 서리에 닥나무는 말라버렸고 세상의 찌는 듯한 더위, 이 산중에도 이르네(倻山霜早 楮木盡枯 世間炎熱 亦到山林)”라는 화답을 정인홍에게 보낸다. 종이의 원료인 닥나무를 구할 수 없고, 너무 더워 부채 따위는 소용없을 것이란 대답이었다.
당대 권력의 실세를 외면한 여대로의 공직생활은 이 사건 이후부터 순조롭지 못했다. 여대로가 합천군수가 된 이후 그의 벼슬길을 가로막는 자가 많아, 조정의 요직에 등용되지 못했다. 훗날 정인홍 등 북인이 광해군을 옹립해 변을 일으킬 기미가 보이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권력의 달콤함에 빠지지 않고 일생을 의인(義人)으로 살았다고 전해진다.
#2.◆ 향토의 자산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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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여씨 하회댁 앞의 농로변에는 큰 그늘을 드리우는 정자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태극의 음에 해당되는 마을의 기운을 조화롭게 만들기 위해 심어진 나무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
고종(高宗, 1852~1919)이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1896년, 김천 구성면에서 성산여씨 승동의 장남 여환옥이 태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여환옥의 기상과 영민함은 인근 동리에 소문이 날 정도로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몸은 매일 찬물에 목욕을 할 정도로 강건했고, 6개 국어를 구사할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지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장성한 여환옥은 1920년대부터 농수산물 위탁 판매업체인 김천흥업사의 감사직을 맡는다. 그가 젊은 나이에 기업의 감사직을 담당한 데는 그의 집안내력이 작용했다. 그는 당시 김천에서 손꼽히는 부잣집의 아들이었고,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여환옥 또한 다른 조선의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피가 끓어올랐다. 조국을 일본에 빼앗겼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어올랐고, 조국의 독립을 한없이 갈망했다.
“나만 잘 살아 무엇한단 말인가…. 교육사업에 힘써 인재를 양성해야겠다.” 여환옥은 1920년대 사비를 털어 자신의 본가에 광명강습소를 개설한다. 지역 청소년들에게 신교육을 가르쳐 독립을 앞당길 인재로 키우기 위함이었다. 1926년에는 금릉학원 유지회에 가입해 이사로 활동하며 교육사업에 몰두했다.
여환옥은 상하이임시정부의 국내 요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27년 자신의 가산을 털어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한다. 집과 토지를 담보 삼아 동양척식주식회사로부터 8만6천원을 융자받았고,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같은 해 신간회 김천지회가 설립될 때는 지회의 경비를 부담하기도 했다.
여환옥은 이 밖에도 당시 옥중에 있던 김준연·여운형 등과 같은 애국지사를 도왔다. 국난의 시기, 자신이 가진 재물로 민족의 부흥을 꾀하는 데 힘썼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表象)으로 손색없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여환옥은 1945년 광복 이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김천지방지부 위원으로, 1950년 정부의 농지개혁 당시에는 농지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여환옥의 생가인 성산여씨 하회댁은 2000년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388호로 지정됐다.
한편 김천시 구성면 광명리(기럴마을)는 김천에서도 대표적인 명당으로 손꼽힌다. 20여년 전, 구성면을 굽어 흐르던 감천이 직강공사로 인해 직선이 되기 전까지 감천은 ‘U’자로 굽이쳐 흐르며 태극(太極)의 형상을 대지에 새겼다. 당시 감천 일대의 마을들은 태극의 원 안에 들어가 있는 형국이었다. 한 유명 풍수지리학자는 광명리 일원을 지목하며 ‘풍수지리의 표본’이라며 극찬했다.
현재 광명리의 농로 가운데에 위치한 아름드리 나무는 이 일대가 명당임을 증명하는 증거다. 몇몇 마을주민은 이 나무가 음을 상징하는 태극의 가운데 점이라고 주장한다. 땅의 정기를 조화롭게 만들려는 ‘비보풍수(裨補風水)’의 하나라는 의견이 다수다.
김천=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도움말=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참고 문헌= ‘김천시사’, ‘디지털 김천문화대전’
공동기획 : 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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