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도소극장’을 기억하시나요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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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5-16   |  발행일 2014-05-16 제33면   |  수정 2014-05-16
대구 실험劇의 성지이자 ‘대구 官許 소극장 1호’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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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7월16일 우여곡절 끝에 대구시로부터 소극장 허가를 받은 분도소극장. 대구시의회 바로 뒷골목 유진건축 지하 환풍구 앞 인도에 퍼질러 앉은 33년전 소극장 두 주역인 이성우(오른쪽)와 이용민씨가 질풍노도 같은 자신의 20대 얘기를 나누고 있다. 본체는 예전 그대로이고 대문은 후에 가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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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계 미국정치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1989년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다.

이 대목에서 ‘예술의 습격’이 시작된다.

20세기 초 ‘전위예술(아방가르드·Avant-garde)’은 세상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해체시키려고 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충격파는 일파만파로 번져갔다. 음악, 문학, 무용, 미술, 사진, 심지어 건축까지, 모든 예술 장르에 걸쳐 대지진이 일어난다. ‘현대미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마르셀 뒤샹은 1917년 소변기를 ‘샘’이란 이름으로 전시장에 내놓아 미국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62년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은 자신을 ‘차세대 국제 예술계를 평정할 칭기즈칸’이란 의미로 “내가 바로 ‘황색재앙(Yellow peril)’”이라고 선언했다. 영국 4인조 록그룹 비틀스의 한 멤버인 존 레논은 ‘비틀스가 예수보다 더 유명하다’고 외쳐 기독교계를 충격에 빠뜨린다.

연극판은 작정한 ‘자객’ 같았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사무엘 베케트, ‘서푼짜리 오페라’의 브레히트,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의 아서 밀러 등 부조리·혁명적 극작가는 권력과 자본의 이면을 섬뜩하게 고발했다.

“전쟁광들아, 짐승 같은 인간들아, 공산당 떼거리들아, 인간의 모습을 한 짐승들아, 나치의 돼지들아, 너희가 늘 보았던 것들을 여기서는 보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늘 들었던 것들을 여기서는 듣지 못할 것이다.”

66년 독일의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기념비적인 연극 ‘관객모독’ 중의 한 대목이다. 그는 형식파괴 ‘언어극’을 발표한다. 앞선 극작가들이 세상을 극복하려고 했다면 관객모독은 기존 연극판의 관행을 갈아엎으려고 했다.

78년 관객모독이 한국에서 초연된다. 서울 신촌시장 안에 있던 ‘극단76’의 대표 기국서는 배우는 연기만 하고 관객은 감상만 하는 일방적 관람 행태에 일침을 가했다. 쌍방향 관람문화의 신지평을 연다. 그는 객석을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물세례를 안긴다. 화가 난 몇몇 관객은 퇴장해버렸다. 2년 뒤 그 작품이 대구에 상륙한다.

1980년 대구시청 뒷골목에 둥지
당시로서는 초파격적 ‘관객모독’
대구지역서 초연 숱한 화제 뿌려
꽃 못다 피우고 1년만에 문 닫아
최근 ‘더 액터즈’로 부활 날갯짓

◆ 1980년 대구 분도소극장의 관객모독

69년 사무엘 베케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인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같은 대구의 두 청년이 있었다.

갓 스물두 살이 된 이성우와 이용민은 그 물세례에 ‘오호쾌재’를 외친다.

‘주변의 나쁜 견해와 습관에 이끌려 그 지배를 받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존경하지 않는다. 자신을 존경하지 않으면 도덕도, 질서도 영속도, 진척시키는 열정도 없다. 그런 인간은 일정한 형태가 없는 쇠똥처럼 부서진다. 그래, 우리도 대구판 관객모독을 실천하자.’

권력과 자본에 휘둘리는 소시민을 ‘쇠똥’으로 본 둘은 체코 출신의 소설가 카프카의 그 말을 경전처럼 품었다. 둘은 절규하지 않고 차라리 ‘절망’했다. 집과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옥탑방’에서 종일 곰팡이처럼 앉아 멍을 때렸다.

둘은 또래가 운동권이 될 때 자신들만은 ‘예술 전위대’가 되고 싶었다. 이념이 아니라 ‘이상(理想)’을 향해 걸어갔다. 그 일환으로 예술의 굿판을 대구 도심에 ‘신단수’처럼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는 유신독재 치하.

공연예술의 ‘빙하기’였다. ‘인허가공화국’이었다. 소극장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운영할 수 있었다. 공연법상 정식으로 허가받지 못한 극장에서는 월 6일 이상 공연을 할 수 없었다. 한 차례에 사흘을 초과할 수 없었다. 사실상 극장을 만들지 말라는 엄포였다. 77년에는 임의단체로 활동하던 극단도 행정당국에 등록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대구엔 단 2개(공간과 원각사)의 극단만이 남는다. 자기 소유의 무대를 갖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다들 대관 공연에 의존했다. 대구YMCA, KG홀(현 대구시민회관), 고려예식장,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강당, 가톨릭근로자회관, 영남·계대강당 등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어떤 경우에는 동촌 그린파크 수영장에서도 공연했다.

둘은 골리앗(대구시청 문호공보실)에게 도전장을 낸다. 78년에 시작된 시청과의 허가싸움은 1년 이상 진행된다. 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서거 즈음 가장 앙칼진 대립각을 유지한다.

“철부지 아이들의 장난터이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 만약 문제가 생기면 내가 다 책임지겠다”면서 이성구의 아버지까지 중재에 나선다.

결국 청년이 이겼다. 80년 7월16일은 둘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대구시는 분도소극장을 관허 공연장으로 허가를 해준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분도소극장은 시청 바로 뒷골목 지하에 있었다. 당시 영남일보 문화부 기자였던 이하석 시인은 ‘향토 연극계에 숨통, 소극장 운동 기대’란 표제의 분도소극장 관련 박스기사를 실었다. 그렇게 해서 대구 지역 연극인은 물론 다른 예술인들에게까지 실험적이었던 ‘분도 소극장’이 태동한다.

지난 13일 밤, 예전 분도소극장 관계자 5명이 33년 만에 모천회귀한 연어처럼 만났다. 이성우는 국제적 클래식 기타리스트로, 이용민은 톱 건축디자이너로, 운영위원이었던 이규리는 시인으로, 신동애는 고품격 숯불갈비집 사장으로, 이들이 훗날 일을 낼 걸 감지했던 이하석 기자는 원로 시인으로 참석해 그 시절 분도의 의미를 되짚었다. 당시 극장장이었던 이성우는 이날 자신이 지난날 분도소극장을 생각하며 동구 신천동 삼환 나우빌 아파트 상가에 마련한 토털 엔터테인먼트 스튜디오 더 액터즈 개관 기념으로 독일의 대표적인 기타리스트의 한 명인 올리버 파타치 나이니와 기타 듀오 공연을 했다.

5명이 그려준 증언을 갖고 대구 아방가르드 예술의 한 흐름을 주도하다 1년여 만에 사라진 분도소극장의 이야기를 복원해본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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