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만에 다시 만난 옛 주역들 ‘분도소극장’을 추억하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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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5-16   |  발행일 2014-05-16 제34면   |  수정 2014-05-16
“우리가 운동권이었다고? 아방가르드한 ‘예술 패거리’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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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분도의 활약상을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관계자들이 지난 13일 33년 전 분도소극장 극장장이었던 이성우씨가 대표로 있는 토털 엔터테인먼트 스튜디오 ‘더 액터즈’(대구시 동구 신천3동 삼환나우빌 아파트 지하)에서 만나 공연문화 부활을 위한 토크를 벌였다. 왼쪽부터 이성우 더 액터즈 대표, 이규리 시인, 이하석 시인, 신동애씨, <주>디자인 피에이엔 이용민 대표.


지난 13일 밤. 33년 전 ‘미완의 혁명’으로 끝난 대구 중구 동인동 분도소극장 관계자와 그룹 인터뷰 시간을 마련했다. 절친인 이성우, 이용민씨를 제외하곤 모두 수십년간 연락이 없어 설렘 가득한 발걸음을 옮겼다. 더 액터즈(The actorz) 미팅룸에 나타난 참석자는 홈커밍 행사에 참석한 고교동창 같았다. 그 시절 숱한 사연과 에피소드를 상기시키면서 때론 박장대소, 때론 장탄식을 쏟아냈다. 한 명의 증언이 확실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더 객관적 사실을 보태주었다. 기자가 영남일보 지하 서고를 뒤져 찾아낸 1980년 7월16일자 분도소극장 허가 관련 박스기사를 내밀었다. 이하석 시인은 산삼을 발견한 듯 한참 그 기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들 지금 사라진 30년 전 한 치기어린 소극장을 다룬다는 사실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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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모독’의 기국서 대표를 만나러 상경

“브라보! 허락받았다. 용민아, 결국 우리가 이겼다. 분도를 소극장의 메카로 만들자. 그런데 개관작은 뭘로 하지?”

“성우야, 우리도 답답한 대구를 향해 물을 퍼붓자. 그러려면 기국서의 ‘관객모독’이 딱이지. 사무엘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너무 축축해서 싫어.”

“당장 서울로 올라가서 기국서를 대구로 데려오자.”

둘은 서울행 야간열차를 탄다. 물어물어 76극단이 있다는 이화여대 앞 신천시장 안으로 갔다.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비포장 장터는 진창이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그럴 듯한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멀리 판자지붕의 가건물이 보였다. 설마 저기는 아니겠지. 반신반의하며 다가갔다. 뉴욕 할렘가보다 더 후졌다. 극단 대표 기국서를 찾았지만 대전 공연 때문에 없었다. 연락처만 남기고 대구로 돌아 왔다. 대전에서 돌아온 기국서가 그 소식을 듣곤 반색을 한다. 광주사태를 알고 있는 그는 관객모독이 아니라 속으론 ‘전두환 모독’을 계획했다. 파충류 혀 같은 미소를 날리며 대구를 향했다.

◆ 문학 소녀… 분도에 사로잡히다

당초 7월16일 개관작을 올리려고 했다.

일이 제대로 정리가 안돼 일주일 늦춰졌다. 그날 저녁 감수성 예민한 한 문학소녀가 지하실 입구에 들어선다. 25세의 이규리 시인이었다. 14년 뒤 시전문지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하게 되는 그녀는 자칭 ‘대구의 버지니아 울프’라 여기며 허무와 전투 중이었다. 서울에서 대박이 난 관객모독을 대구에 처음 끌고 내려 온 분도소극장을 격려하고 싶었다. 그런데 공연을 연기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는 걸 보고 극장장에게 항의하려고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나온 이성우는 마치 백혈병 환자처럼 야위었고 창백했다. 항의하려던 맘이 사라지고 졸지에 분도의 광팬이 된다.

“충격이었습니다. 당시 대구의 공연예술은 천편일률, 지리멸렬이었어요. 그런데 분도는 달랐어요. 흑과 백이 완벽한 앙상블을 이루고 있는 그렇게 세련되고 절제된 인테리어 공간은 처음이었어요. 너무나 시적이었고, 시를 공부하던 제겐 구원투수였어요. 저는 전면에서 운영진으로 뛴 게 아니라 그림자처럼 늘 뒤에서 응원했어요. 당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월급을 받으면 남 몰래 제작비에 보태라고 돈을 어느정도 전하기도 했습니다. 분도가 없었다면 저는 시인으로 등단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르죠. 아참, 분도가 제 남편(경북대 건축학과 이정호 교수)을 만나게 해줬어요.”

◆ 서울 공간사랑의 유전자 분도에 옮겨주다

이 대목에서 당시 분도의 인테리어를 책임졌던 이용민이 김수근 건축의 금자탑으로 불리는 서울시 종로구 원서동 복합문화공간 ‘공간사랑(空間舍廊)’의 해묵은 담론을 갖고 등장한다.

“제가 대구로 내려왔을 때 성우는 분도 허가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더군요. 우린 10대부터 정규 교육을 거부하면서 조금은 오스카 와일드(예술지상주의를 외친 영국의 작가)적으로 살았죠. 제 예술적 감각의 출발은 서울 공간사랑입니다. 미학적 충격의 완결판이었죠. 거기서 엄청난 동지를 만납니다. 한국에서 ‘문화기획’이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안동탈춤페스티벌 등 국내 메이저 축제의 밑그림을 그려준 강준혁 극장장이었습니다. 그는 제 롤모델이었죠. 도움을 받아 공간사랑의 기운을 분도에 옮겨심을 수 있었죠.”

공간사랑은 77년 4월22일 개관한다. 블랙박스형 극장이었다. 가로 45㎝, 세로 45㎝ 크기에 15㎝와 30㎝ 높이의 두 가지 흰색 박스를 조합하여 객석을 만들었다. 당시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구도였다. 승효상(건축가)의 아이디어였다.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까지 주문해 놓았다. 김덕수 사물놀이패도 거기서 국내 첫 공연을 했다.

“처음엔 분도를 홍보하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만나는 사람에게 우리 소극장이 시청 뒷골목에 있다는 것부터 얘기했습니다. 홍보요원을 영업용 택시운전사로도 활용합니다. 택시마다 분도 전단지를 꽂아두었습니다. 하지만 다들 분도를 일반 영화관으로 알거나 심지어 다방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돈벌이를 위해 커피도 팔았습니다. 초창기엔 오는 이에게 공짜로 음료를 대접했습니다. 그러다가 300원씩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중구청 위생과에 알려집니다. 불법영업 사실을 캐기 위해 불시방문을 했습니다. 우린 너무 혼이 나서 후엔 맹물과 음악만 갖고 대접했습니다.”

◆ 마임과 모노드라마 특화시킨 분도

이성우가 “맞다 맞다”면서 말을 섞는다.

“당시 첫 포스트에 적었던 글귀가 생각나네요. ‘일천구백팔십년 유월의 첫날, 우리들은 서로 사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였어요. 집주인이 정말 호인이었어요. 누군 그 무렵 발생한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권력에 항의한다는 의미로 그곳을 선택한 줄 아는데 아니에요. 우린 운동권과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예술 패거리였죠. 그러니 운동권이 우리 공간에 올 리가 없죠. 70석 규모였습니다. 바닥에는 귀티가 나게 연회색 카펫을 깔았습니다. 흰색 박스는 의자 겸 무대용으로 사용했습니다. 일단 기존의 패턴부터 철저하게 거부했습니다. 음악도 국내가요는 물론 팝송까지 멀리했습니다. 오직 정통 클래식만 고수했어요. 개관작을 보러 온 대구시청 간부들이 일부러 앞자리에 앉았다가 기국서 대표한테 된통 물세례를 받았죠. 당황했지만 내색은 못했죠. 관객모독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이어 서울서 쟁쟁한 멤버를 초대했어요. 특히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공연 장르로 불렸던 마임에 집중적으로 투하했어요. 그때만 해도 대다수 대구 문화인은 마임이 뭔줄 모르고 있을 때였어요. 분도가 마임을 전국에서 맨 먼저 특화했죠. 한국 마임 1세대인 김성구는 페트 한트케의 ‘미성년은 성년이 되려한다’, 유진규는 ‘동물원 구경가자’, 장희용은 모노드라마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오태석 작)를 열연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예매처 잡는 게 무척 버거웠어요. 당시 예매처로 다방이나 음악감상실을 주로 이용했는데, 이런 곳에서 예매되는 건 대개 한두 장에 불과했죠. 고심 끝에 대학교를 잡습니다. 처음엔 우릴 이방인처럼 보던 학생들도 쉽게 우리편이 되어 주었습니다. 나중엔 예술 전 장르를 갖고 ‘한판 80’이란 토털아트페스티벌로 풀어냅니다. 서울 프랑스 문화원을 통해 실험영화 필름까지 갖고 내려왔어요. 대구 건축계의 김수근 같은 존재인 박재봉 선생도 많이 도와주었죠. 그런데 대구 연극계의 산증인이었고 지금은 고인이 된 원각사 대표였던 이필동 선생한테는 개인적으로 미안하죠. 원각사에서 ‘티타임의 정사’를 대관 신청했을 때 저희가 거부했거든요.”

◆ 극장장 예술만 알지 살림은 빵점

신동애씨가 빛바랜 책 한 권을 내민다.

81년 11월 대안연극단체인 ‘예니’가 기획출간한 ‘연극, 우리들의 생존’(백제)에 지방에선 유일하게 분도소극장이 언급된 사실을 알려준다. 그녀가 실험극 때문에 열악해진 소극장 운영의 고충을 귀띔해준다.

“분도는 주인보다는 일하는 사람만 있던 곳이었어요. 최면제 같았죠. 분도에 오면 뭘 챙기지 못하고 자꾸 주게 돼요. 극장장이 열정뿐이고 셈법이 없다보니 그랬겠죠. 극장장은 예술만 알지 살림은 빵점이었어요. 지금은 스페인으로 간 친구인 이국희와 함께 우연히 여길 왔다가 덜컥 분도의 고강력 거미줄에 걸렸어요. 그날부터 분도의 무수리가 되죠. 저는 국희와 기획을 맡았어요. 지금처럼 온라인 티케팅이 없어 직접 홍보를 하고 예매를 하고 수금하러 다녀야 했습니다. 포스터 뭉치와 테이프를 갖고 도심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개관 준비 때문에 너무 많은 돈을 사용했습니다. 실탄이 바닥났어요. 서울서 내려온 배우 출연료가 없어 시청 근처 갈비집에 데려가놓고 저희는 한푼이라도 아끼려고 식당을 나오기도 했습니다. 성우형은 운영금을 벌기 위해 몇 차례 클래식 연주회도 열었습니다. 우린 라면과 식빵으로 끼니를 때웠습니다. 하지만 주위의 시선은 너무나 차가웠어요. 지역 연극인들은 우릴 ‘어디서 굴러 먹다 흘러온 개뼈다귀냐’는 식으로 홀대했습니다. 그때 이하석 시인, 당시 영남일보 문화부 기자가 샛별처럼 나타나서 우릴 힘나게 해줬어요. 가끔 공연 기사를 챙겨주셔서 얼마나 위안이 됐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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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공간사랑’ 분위기를 내기 위해 마련한 흰색 박스 의자에 나란히 앉아 대구 아방가르드 예굴의 앞날에 대해 고뇌했던 당시 20대초반의 분도소극장 주역들. 사진 앞줄 왼쪽으로부터 김광만(시인), 이성우(극장장)·이정호(당시 운영위원, 현재 경북대 건축학과 교수)·이용민(기획책임자)씨.


◆ 분도 주역이 나중에 크게 대성할 줄 알았다

4명의 얘기를 눈을 지그시 감고 듣고 있던 이하석 시인이 한마디 섞는다.

“시청 뒷골목에 정체불명의 소극장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을 확인했습니다. 순간, 뭔가에 한방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과연 이게 대구에 있는 소극장이 맞는가’란 의문이 들더군요. 당시 대구의 연극은 그냥 전통극의 답습 수준을 못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모더니즘 가득한 실험극, 부조리극은 엄두도 못낼 때였습니다. 다들 자기 공간이 없어 대구시민회관 무대 등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술적 아우라보다는 예능적 끼만 보였죠. 그런데 분도의 주역은 달랐어요. 매우 아방가르드하고 시대적이었습니다. 77년 공연법 개정으로 발이 묶인 한국연극계는 특히 200석 미만의 연극전문 소극장 설치허가 기준이 워낙 까다로워 큰 타격을 받았죠. 분도는 당시 지방 연극계에선 한획을 긋는 공간이었습니다. 서울의 실험극장에 이어 두 번째 관허 소극장이라는 데 큰 의미를 두고 박스기사를 썼습니다. 특히 연극뿐만 아니라 미술전시, 음악공연, 학술회의 등까지 겸하고 있는 지역 첫 다장르 예술전문 소극장이었어요. 비록 1년 남짓한 시간만 존속했지만 훗날 주역이 모두 자기 분야에서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는데 오늘 그게 사실이란 걸 확인하게 됐네요. 원래 진짜는 오래 폼잡지 않고 잠시 번쩍하다 자폭하는 겁니다.”

◆ 취재후기

80년 당시 대구에는 공교롭게도 두 개의 분도가 존재한다.

하나는 소극장 분도였고, 또 하나는 기독교 전문출판사 겸 서점인 분도였다. 하지만 둘의 어원은 달랐다. 전자는 ‘각을 나누다’란 의미로 분도(分度), 후자는 가톨릭계의 성인인 베네딕토의 한자어인 분도를 사용했다. 둘은 지근 거리에 있었다. 이성우 극장장이 훗날 분도 서적을 찾아 인사를 하고 예매처로 정한다. 분도서적은 자체 출판사를 갖고 있었고 90년대 초 분도기획이 된다. 2004년 중구 대봉동 40-62 패션디자이너 박동준씨의 빌딩 지하에서 떼아뜨르 분도 소극장으로 태어난다. 이성우는 그런 인연으로 훗날 여기서 클래식 연주회를 갖는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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