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볕이 따가운 휴일 오후, 동기 녀석들과의 모임이 모교 근처로 잡혀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하게 되었다. 약속시간이 꽤 남아 간만에 교정이나 둘러볼 생각에 한 걸음 두 걸음 걷다 보니 무더운 날씨에 흘린 땀방울만큼이나 학창시절의 추억에 흠뻑 젖었다. 남녀가 처음부터 끝까지 걸으며 아는 사람을 한 사람도 마주치지 않는다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러브로드, 시험기간 밤샘공부를 했던 과방, 수업을 몰래 빠져나와 선·후배들과 술 한 잔 기울이던 잔디밭,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이다 교문이 닫혀 넘었던 담장….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정문에 다다랐다. 학교와 밖을 차단했던 담장을 헐고 무성했던 나무 대신 잔디와 벤치를 깔아 예전보다 훨씬 예쁘게 바뀌었지만 학교의 교훈을 담고 우뚝 솟은 교훈탑만은 그대로 있었다.
어떠한 부연설명도 없이 ‘진리, 긍지, 봉사’ 이 세 단어만 적힌, 어찌보면 무심한 듯 오만하게 솟아있는 이 탑을 보며 문헌정보학과 사서에 대해 방황했던 필자의 옛 모습이 떠올라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수능성적에 맞춰 들어간 문헌정보학과에 대해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대학생활 내내 방황했다. 그러다 어느 날 인생을 바꿔준 영화 ‘Tomorrow’를 만났다.
“가지고 있는 게 뭐예요?”
“구텐베르크 성경이죠. 희귀 책이 보관되어 있었죠.”
“하나님이 구해줄 거라 믿어요?”
“아뇨, 하나님을 믿지 않아요. 책을 보호하려는 겁니다. 처음으로 인쇄된 성경이에요. 이성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거죠. 내 생각엔 문자가 인류의 최고 업적입니다. 웃긴 얘기겠지만 서구 문명이 끝장난다면…, 적어도 난 이것 하나만은 지키고 싶어요.”
갑작스럽게 찾아온 빙하기로 인하여 주인공 일행은 도서관으로 피신하게 되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서관의 책을 장작 삼아 태운다. 그때 옆에 있던 사서는 다른 책을 아무리 불태워도 자신의 목숨처럼 책 한권을 꼭 붙들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재난영화로 기억하지만 필자에게는 전공과 사서라는 직업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 영화였다. 문헌정보학이란 인류의 최고 업적을 수집, 정리, 축적, 배포에 관해 연구하는 것이고, 사서란 이 위대한 업적들이 모인 공간을 무대로 활동하는 주체인 것이다.
아무생각 없이 지나던 교훈 탑도 그 이후 다시 보니 도서관만큼 어울리는 곳이 없다. ‘사서로서 긍지를 가지고 진리를 봉사한다.’ 참으로 얻을 게 많은 모처럼의 모교 나들이였다.최창익 <범어도서관 사서>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