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급지체장애 딛고 ‘발가락화가’로…스물다섯 청년 표형민씨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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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6-05   |  발행일 2015-06-05 제36면   |  수정 2015-06-05
“5세부터 발로 그림 연습 12월쯤 개인전…언젠가 독립해 가정 꾸리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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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형민씨가 성보재활원 전자조립실에서 발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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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형민씨가 3단하모니카를 불며 ‘엘에스투(Erestu)’를 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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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형민씨는 손 대신 발로 전동휠체어를 조작한다.



인물·건축물 묘사 섬세
오른발 엄지와 검지 사이
그림 도구를 끼우고 그려
그림 마음에 안 들면?
왼발에 지우개 끼워 슥삭∼

하모니카 연주단 활동도

50사단 홍보대사 위촉돼

전동차, 발가락으로 운전
먹고 씻고 옷 입는 것만
주위의 도움받아
대부분 일은 혼자서 척척


행복전도사 닉부이치치, 장애인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이자 세계적인 가스펠 가수 레나 마리아, 베스트셀러 ‘오체불만족’의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 발가락 시인 이흥렬씨.

이들의 공통점은 팔과 손을 사용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이다. 하지만 모두 뼈를 깎는 노력으로 선천적 장애를 극복하고 발과 발가락으로 비장애인보다 더 위대한 업적을 쌓은 인물이다.

대구에 사는 표형민씨(25)도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신체적 장애와 어려운 환경을 딛고 화가로, 하모니카 연주자로 꿈을 펼쳐가고 있다.

표씨는 1급 지체장애인이다. 두 팔은 있지만 팔의 힘만으로 일상에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상체를 움직이거나 몸의 반동으로 팔이 따라 움직일 뿐이다. 다리 역시 불편하다. 가늘고 힘이 약해 정상적으로 걷기가 어렵다. 쉬지 않고 50m 이상 갈 수 없다. 전동휠체어가 없으면 이동이 불가능하다. 휠체어는 손 대신 발을 이용해 운전을 한다.

“태어나서 7세까지 걸을 수 없었습니다. 앉아서만 생활했지요. 그런데 댄스그룹 ‘젝스키스’의 자선공연 성금으로 수술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후원인 덕분에 여수재활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이후 2~3년간 꾸준히 재활치료를 받아 조금이라도 걸을 수 있게 됐어요.”

표씨는 발로 그림을 그리는 구족화가다. 그의 그림은 사진처럼 섬세하고 정교하다. 1960년대 후반~70년대 초 미국과 유럽에서 유행했던 극사실주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그가 9년간 다녔던 성보학교의 전자조립실 벽면엔 그의 그림이 빽빽하게 걸려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 스티브 잡스, 방송인 강호동 등의 인물을 비롯해 호랑이 같은 동물과 에펠탑, 자유의 여신상 같은 옛 건축물 소묘도 있다. 주로 연필이나 색연필, 볼펜, 붓펜을 사용해 그렸다.

“풍경보다 인물이나 건축물에 관심이 많아요. 주로 인터넷에서 그림이나 사진을 내려받아 그립니다. 캐리커처, 만화, 영화포스터 등 다양합니다. 트랜스포머 작품은 성보재활원 바자회 때 팔리기도 했어요.”

그는 오른발 엄지와 검지에 그림도구를 끼우고 그리다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왼발에 지우개를 끼워 지운다. 붓펜으로 그릴 때는 지울 수가 없어 여러 번 다시 그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두 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이밖에 그는 발을 이용해 PC는 물론 스마트폰도 사용할 수 있다. 인터넷게임과 SNS도 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발로 가능하다.

하지만 표씨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것도 있다. 혼자 식사를 하고, 씻고, 옷을 입고 벗는 일은 불가능하다.

“처음엔 접시에 밥과 반찬을 담아 입으로 먹었는데 남들 보기에 좋지 않아서 지금은 성보원의 사회복지 선생님이나 형, 동생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그 밖의 것은 스스로 해결한다. 양말도 혼자 신고, 양치질 하는 방법도 스스로 개발했다. 그림을 그리면서 발로 하는 모든 감각능력을 키웠다.

“5세부터 발로 그림을 그리는 연습을 했습니다. 벌써 20년쯤 됐네요. 애망원에 있을 때 미술과 과학을 가르치는‘색동이교육’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전 미술을 선택했어요. 그림을 그리면 모든 것을 잊고 몰두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는 그림말고도 공을 이용하는 보치아(boccia·중증장애인을 위한 운동종목)에도 재능이 있다. 발로 공을 다루는데 손으로 다루는 것 이상의 실력이다. 가끔 성보재활원의 친구들과 함께 족구 비슷한 공놀이를 하는데 그의 오버헤드킥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이밖에 사물놀이의 꽹과리주자이기도 하다.

표씨는 낳은 부모가 누군지 모른 채 9세 때 애망원에서 성보학교로 왔다는 기억이 전부다.

“얼마 전 우연히 애망원에 가보았습니다. 제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보려고요. 2세 때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백백합보육원에서 애망원으로 보내졌더군요. 애망원 기록에 따르면 부모님께서 저를 일주일 동안 아동보호센터에 맡겨놓았다가 데리고 가지 않았다고 해요. 이후 경찰에 의해 수녀원으로 가게 됐다고 하더군요.”

그는 자라면서 부모에 대한 원망을 많이 했다. 사춘기를 거치면서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낙담을 하며 방황을 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그는 그림 공부에 더 매진했다. 한편으로 기독교 신앙과 음악이 큰 힘이 됐다.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부모님을 보고 싶은 마음도 그렇게 간절하지 않았다. 표씨는 성보학교를 졸업하고 전남직업전문학교에서 1년간 컴퓨터디자인을 공부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싶은 마음이야 왜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학비에다 통학하기도 힘들고, 4년간 저를 도와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는 발을 이용해 일반컴퓨터의 마우스로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자판도 마음대로 두드린다.

“당신이 일으켜 주기에 나는 산 위에 우뚝 설 수 있고/ 당신이 일으켜 주기에 나는 폭풍의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어요/ 당신의 어깨에 기댈 때에 나는 강해지며/ 당신은 나를 일으켜 나보다 더 큰 내가 되게 하지요~”

그는 아일랜드의 가수 브라이언 케네디(Brian Kennedy)가 부른 ‘유 레이즈미 업(You raise me up)’을 하모니카로 연주하길 좋아한다. 노래가사처럼 자신보다 더 힘든 환경이나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도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20세 때 성보학교 노봉남 선생이 만든 ‘맑은소리하모니카 연주단’에 입단했다. 이 연주단은 2009년 장애인의 재활치료와 사회적 소통을 목적으로 창단했는데, 지금까지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방과후 오후 3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연습을 한다. 현재 단원은 9명으로 성보학교 출신 선후배로 구성돼 있다. 연주단은 지금까지 기관이나 교회, 사찰, 병원 등지에서 200회 이상 공연을 가졌으며 미국의 로스앤젤레스(LA)와 휴스턴에서도 공연했다. 교민을 비롯해 현지 미국인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이 연주단은 대구의 소아과 의사인 김은정 원장, 대구여성경제인 봉사단체인 노블리쥬의 이진주 회장 등이 후원을 하고 있다. 또 대구시청과 대구시교육청도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 표씨는 연주단원 가운데 가장 맏형이다.

“연주단 후원자인 발명가 정구관 선생님이 저를 위해 특별히 3단 하모니카를 만들어주셨습니다. 3개의 하모니카를 각각 이음쇠로 고정한 뒤 목걸이에 매달아 부는데, 하모니카를 불면 삶이 즐거워집니다. 듣는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으니 일석이조입니다. 불편한 몸으로 연주를 해 남에게 들려줄 수 있으니 전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하하.”

얼마 전엔 대구학생문화센터에서 대구지역 학생들을 대상으로 1시간의 공연과 1시간의 강연을 했다. 주제는 ‘장애인식 개선’이었다.

“제가 태어나 자라면서 지금까지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미술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으며 하모니카를 불면서 느끼는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닉 부이치치를 좋아하는데 저는 음악과 그림을 통해 행복전도사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지난 2일엔 50사단을 방문해 사령부에서 홍보대사 위촉증서를 받았다. 신병교육대대에서 열리는 신병 입영행사에 참석해 장병들에게 하모니카 연주도 들려줬다.

노봉남 선생은 표씨가 맏형으로서 솔선수범하며 연주단을 위해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칭찬했다. 표씨는 연주단과 함께 국내외를 누비며 희망을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싶은 게 꿈이다.

“현재 성보재활원에서 생활하지만 언젠가는 자립해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고 싶습니다. 후원자인 황양희 선생님께서 갤러리를 제공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올 12월엔 제 그림을 가지고 개인전도 하고 싶습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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