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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득 흙이 만지고 싶었을까. 지나간 조상님 기일 아침에 화분에 고추 모종을 심었다. 물 몇 번 주었을 뿐인데 얼마쯤 지나자 성큼 자라서 가지마다 고추가 열리는 중이다. 부침개와 고추조림까지 맛본 오늘, 다시 또 고추나무에 눈이 간다. 비스듬히 쓰러져서도 열매를 지탱하고 있는 화분이 안쓰럽기도 해서다. 고추는 흙이 보낸 선물 아니던가, 어린 실뿌리가 흙에 안겼을 땐 지극한 삶의 인사가 흠뻑 젖어있었을 터, 푸르고 힘찬 흙의 모성에 발목 적시며 시들지 말라고, 즐거운 가슴이 되어 서로 감쌌을 화분과 흙을 쓰다듬어 본다.
흙은 잊었던 고향냄새를 떠올리게 한다. 즐거움을 실어나르는 힘이 있다. 단절된 공간에 있을지라도 이따금씩 꼬마 흙 화분이라도 바라볼 일이다. 카뮈의 소설 ‘요나’가 생각난다. 화가 요나는 그림으로 성공한다. 그럴수록 사람과의 사이에 농담 하나 나눌 사람도 없이 소외 당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소설은 “그가 지붕 밑 방에 칩거하여 며칠이고 내려오지 않아서 누군가 올라가 보았더니 캔버스 앞에 쓰러져 있었으며 아무런 그림도 그려져 있지 않고 희미한 글씨만 씌어 있었다. 그 글씨를 ‘고독(solitaire)’이라 읽어야 할지 ‘연대(solidaire)’라 읽어야 할지 알 수가 없고 식물을 감싸고 있는 화분 하나도 없었다”라고 끝맺고 있다.
흙을 만져보는 감촉, 흙의 냄새가 오늘따라 유별하다. 풋풋하게 절은 깨끼적삼의 할머니 땀 냄새가 시커메진 흙이 되어 소곤댄다. 세월 다진 입자들로 구성된 언어처럼 뭉클, 가슴에 와 닿는다. 결국엔 내가 흙으로 돌아갈 처소이듯, 귀의(歸依)라는 생각에 생각을 물고 공허한 마음을, 갑작스레 들이닥친 소나기처럼 강한 힘으로 채우려든다. 땅으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것들, 그 자우룩함 속의 도란거림이 고개 끄덕이는 할머니의 포옹이 되어 새롭게 다가온다.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란 시는 잦은 관심에 지쳐서 쉽게 망가지는 화초와 같은 말이기도 하다. 흙만 채워서 사무실이나 좁은 일터에 두면 제 역할을 다하는 식물에 더 관심이 간다.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고 거칠게 큰 아이들이 강하고 좋은 본성일 수도 있듯 벌레 없이 병에 강한 식물이 흙에 의지해서만 살아가는, 그런 식물들에게서 나는 생명의 의지를 배우기도 한다. 한 번쯤 흙냄새로 인하여 고향의 정서를 듬뿍 받아볼 일이다.이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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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흙냄새](https://www.yeongnam.com/mnt/file/201507/20150715.010230756170001i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