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가을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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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0-08  |  수정 2015-10-08 08:43  |  발행일 2015-10-08 제34면
[문화산책] 가을밤에
권원순 <미술평론가 >

여름은 언제나 작열하는 눈부신 태양과 산 능선 뒤로 피어나는 뭉게구름, 밀려오는 검푸른 파도와 해풍, 힘차게 쏟아지는 폭포와 쫓기듯 바삐 흐르는 시냇물, 형형색색의 꽃과 나무들, 그리고 곤충과 벌레들이 펼치는 생명의 향연이다. 그러나 이미 가을은 왔고 짙어가고 있다.

가을이 되면 우리는 쓸쓸하고 심각하며, 잊힌 옛날 일들을 추상(追想)하며 외로움을 느낀다. 만일 역순으로 가을 앞에 겨울이 있었다면 같은 감정을 갖게 될까. 여름 다음 가을의 감정과는 판이할 것이다. 지난 여름이 펼쳐준 갖가지 형색의 시각적 언어와 수다스럽고 요란한 벌레들의 청각적 언어에 대한 상실감과 공허감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정 그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6월 더위가 시작될 즈음 무심코 창문을 열고 긴 여름을 보내고, 9월 들어 스산한 바람이 방 안을 채우면 여름 내내 쌓였던 창턱의 먼지를 쓸어내고는 무심코 창문을 닫는다. 열린 창문으로 외출했던 내가 닫힌 창문 안에서 나를 만났기 때문에 심각해지고 슬픔과 고독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제 테이블의 스탠드 불을 켜고 턱을 괸 채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왜 하숙집 여주인을 살해했고 ‘To be or not to be, that’s the question’이라 한 햄릿은 무엇을 고민했을까. 17세기의 스페인은 왜 환상과 현실이 뒤죽박죽된 돈키호테와 시종 산초를 탄생시켰고, 러시아 공산혁명의 격동기, 닥터 지바고는 왜 설원을 헤매며 ‘Where is my Lala?’를 외쳤을까. 그리고 뫼르소는 왜 알제의 눈부신 태양 때문에 아라비아 사람을 권총으로 사살했을까. 소크라테스는 아가톤 집 향연에서 제자들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고 니체는 왜 ‘신은 죽었다’고 했을까.

암수술로 입원했던 병원 창 너머 연탄 리어카를 끌고 미는 노부부를 보고 “저 사람들이 참 부럽다”고 중얼거리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잊히지 않는 슬픔이며, 어린 시절 골목에서 해 질 때까지 구슬치기하며 놀던 동무들과 노래하며 돌아오던 가을 소풍 길은 그립고 애잔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지난날의 아픔과 그리움은 왜 가을이면 생각나고 슬픔으로 가슴을 적실까. 되돌아올 수 없는 세월의 강물에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가을은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되새겨 준다. 가을이 안겨준 갖가지 상념들을 붉은 단풍잎에 새겨 책갈피에 꽂고, 이 성숙한 가을밤을 포옹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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