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육사문학기념관’상량식 참석한 이육사 시인 외동딸 이옥비 여사

  • 박진관
  • |
  • 입력 2015-10-23   |  발행일 2015-10-23 제36면   |  수정 2015-10-23
“아버지 육사는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과 윤세주를 존경했다”
20151023
이육사 시인의 외동딸 이옥비 여사가 지난 16일 대구이육사문학기념관 건립 상량식에 참석했다. 이 여사가 기념관 앞에서 선친을 회고하고 있다.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지난 16일 오전 대안천주교회(대구시 중구 서성로16길 77) 북편에 ‘대구 이육사문학기념관’(가칭) 상량식이 열린 가운데 이육사 시인의 외동딸 이옥비 여사(74)가 기념관에 사용될 대들보에 선친의 시 ‘광야’의 시구(詩句)를 적었다. 이 여사는 박현수 경북대 국문학과 교수의 초청으로 대구를 방문했다. 박 교수와 그의 지인이 출연해 건립하는 문학기념관(연면적 99㎡)은 2층 목조건물로, 1층은 특별기획전시실과 카페, 2층은 상설전시실로 꾸밀 예정이다. 육사의 고향에 건립된 문학관(안동시 도산면 백운로 525)과 구별하기 위해 ‘문학기념관’으로 명명된 이 기념관은 오는 12월 말이나 육사 시인의 기일인 내년 1월16일 전후에 개관된다.

이날 이옥비 여사와 박 교수 등 일행은 민족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1904~1944)가 청·장년기에 활동했던 대구지역 발자취를 찾아 답사했다. 생애 40년 가운데 절반 가까이를 대구에서 보낸 육사에겐 대구가 ‘제2의 고향’이나 진배없다. 영남일보 위클리포유 4월17일자 대구지오는 육사가 거주했던 대구부(府) 남산정(町) 662의 35(현 대구시 중구 중앙대로 67길 19-12)가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있음을 최초로 밝힌 바 있다.

육사는 16세 되던 1920년 그의 형 원기, 동생 원일과 함께 먼저 대구로 온 다음 부모와 나머지 가족이 이사를 왔다고 알려진다. 육사가 대구에서 처음 거처했던 곳은 실달사(옛 일본 사찰·현 대구 서문로교회) 맞은편으로 숙부 이세호의 집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잠시 머물다 남산동으로 이사를 갔으며 1937년 서울 명륜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옥비 여사는 서울에서 태어나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6세 때 어머니와 함께 작은할아버지(이세호) 집에 거주하다 8세 때 현 대구시 중구 삼덕동2가 187-1(현 SK브로드밴드 빌딩)로 이사를 와 1969년 서울로 이주할 때까지 대구에서 살았다. 이 여사는 대구 수창초등을 1년 다니다 2학년 때 삼덕동으로 이사를 와 동인초등을 졸업하고 제일여중과 대구여고를 졸업했다.

일행이 처음 찾은 곳은 서문로교회 정문 맞은편에 있던 이세호의 집이다. 이 여사는 골목을 따라가면서 옛 기억을 더듬었다.

“종로초등학교 뒤 담벼락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로터리가 나와요. 거기서 오른쪽으로 곧장 가면 실달사가 있었어요. 실달사 맞은편에 작은할아버지 집이 있었는데 2층 한옥이었습니다. 마당이 꽤 넓었고 우물도 있었는데 지금은 없네요.”

20151023
이옥비 여사가 육사 시인이 살았던 대구시 중구 남산동 662-35번지에 서 있다. 그녀는 선친의 생거터가 보존되길 원했다.




서대문형무소서 베이징으로
압송되는 아버지
만 세살 때 마지막으로 뵈어
초중고 다닌 대구 제2의 고향
사춘기 땐 문학 좋아했지만
아버지가 유명한 분이라 불편
문예부가 아니라 가사부 들어


이 여사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가리킨 곳의 주소는 대구시 중구 북성로 60-1로 현재 기계공구 가게가 들어섰다. 일행은 육사가 자주 드나들던 옛 조양회관 터(달성공원 앞 달성빌딩 유료주차장 인근)로 이동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아버지께선 종종 조양회관에서 주무시고 올 때가 많았다고 그랬습니다. 어릴 때 기억에 늘 경찰이 우리 집 주변을 배회했어요. 아버지와 백부, 숙부가 다 독립운동을 했으니까 감시하느라 그랬겠죠. 전 경찰서 앞을 지나가기 싫어 일부러 빙 둘러 가기도 했습니다.”

이어 육사가 근무했던 중외일보 대구지국으로 이동했다. 계산동 중외일보 옛터는 현재 모텔로 변했다. 일행이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육사가 가장 오래 거주했던 대구시 중구 남산동 662-35 옛집이다. 지난 4월17일 위클리포유가 보도했던 곳이기도 하다.

“남산동에 친척집이 있어 가끔 놀러갔습니다. 그때 어른들께서 네 부모님이 살던 집이 저쪽 동네에 있다고 했어요. 그때 직접 가 보고 사진을 찍어놓았어야 했는데 정말 후회가 되네요. 그분들이 살아계실 때 조금만 더 일찍 이곳을 찾아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현재 이곳은 재개발주택조합이 결성돼 재개발이 진행될 예정이다. 향후 한옥이 철거되고 고층아파트가 들어서면 육사의 생거 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게 분명하다. 위클리포유에선 중앙대로길 67을 ‘이육사로’로 정하고 생거를 보존해야 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 박 교수는 대구에 남아있는 육사의 유일한 자취가 이곳인데 생거터 보존 방안이 절실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구가 배출한 이상화·현진건·이육사·장만영 같은 훌륭한 문인이 많음에도 문학관 하나 없다고 개탄했다. 이 여사는 아파트를 지으면 일정 공간의 공원 부지를 의무적으로 마련해야 하는데 생거만이라도 보존됐으면 좋겠다고 박 교수를 거들었다. 일행은 인근 찻집으로 가 이 여사와 인터뷰를 했다. 그녀는 현재 안동 이육사문학관과 가까이 있는 목재 고택에 살고 있다.

▲육사문학기념관이 대구에도 생긴다. 상량문을 썼는데 감회가 어떤가.

“대구에서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게 놀랍고 감사하다. 규모는 작아도 보기 좋다. 좋은 열매를 맺길 바란다.”

▲육사가 대구에서 활동할 때 친했던 문인은 누군가.

“이병각·신석초 시인과 친했다. 존경하는 인물로는 의열단 단장이었던 약산 김원봉과 윤세주다.”

▲아버지에 대해 남아 있는 기억이 있나.

“아버지께서 서대문형무소에서 베이징으로 압송될 때 만 3세였다. 이웃에 살던 종조부를 따라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뵈었던 기억이 난다. 포승줄에 꽁꽁 묶여 용수(죄수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머리에 씌우는 둥근 통)를 쓴 모습이었다. 중학교 때 대구 삼덕동에 살았는데 창문을 열면 대구형무소가 보였다. 어느날 죄수들이 포승줄에 묶여 용수를 쓰고 가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는데 아버지 마지막 모습과 너무 흡사했다. 어머니께 말하면 슬퍼할까봐 혼자 끙끙 앓았다. 또 하나는 아버지께서 토종 달걀 빛깔이 나는 아이보리색 양복을 입었던 기억이 난다. 나비넥타이를 맸는데 신사였다. 조풍연 선생이 아버지의 옛 사진을 공개한 적이 있는데 사진 속 아버지께서 내가 기억한 대로 아이보리색 양복을 입고 나비넥타이를 맸더라. 어머니께서 ‘야야, 니가 내보다 더 여물다’고 했다.”

▲‘옥비’라는 이름이 예쁘다. 보통 이름에 구슬 ‘옥(玉)’이나 왕비 ‘비(妃)’를 많이 쓰는데.

“아니다. 기름질 ‘옥(沃)’에 아닐 ‘비(非)’다. 아버지께서 직접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 ‘기름지고 비옥하게 살지 말고 소박하고 검소하게 사라는 의미다.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의 유지(遺志)가 내 이름 속에 남아 있다.

▲이 여사의 고향도 대구인 것 같다. 학창 시절 이육사 시인의 유일한 혈육이라서 주목을 받았겠다.

“초·중·고를 대구에서 다녔으니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대구가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다. 사춘기에 문학을 좋아했는데 문예부에 들지 않고 가사부에 들어갔다. 아버님이 유명한 분이라 불편했다. 국어선생님이 교과서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시를 나보고 읽으라고 했다. 어머니께선 대단히 엄격했다. 회초리를 맞고 자랐고 외동딸이라고 특별히 챙겨주지 않았다. 어머니가 1984년에 돌아가셨는데 환갑 때 회색옷 입은 걸 처음 봤다. 죄인이라며 평생 흰옷만 입었다.”

▲육사의 시 가운데 어떤 시를 좋아하나.

“총 40편 정도인데 다 좋다. 광야, 청포도, 절정, 황혼, 꽃은 외운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