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보는 창] 빈곤과 비만이 공존하는 필리핀

  • 조상우 경북 수출지원 해외 서포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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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2-25 17:32  |  발행일 2025-12-25
필리핀은 빈곤과 영양결핍이 심각한 가운데, 역설적으로 비만의 급속한 확산이라는 또 다른 보건 위협에 직면해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필리핀은 빈곤과 영양결핍이 심각한 가운데, 역설적으로 비만의 급속한 확산이라는 또 다른 보건 위협에 직면해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그 나라에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아이템은 무엇인지, 실제 경제지표는 어떻게 파악하는지, 우리나라에 반영이 가능한 정책 성공사례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등이다. 경북PRIDE기업 CEO협회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지역 기업들의 해외시장 조사 및 정보 수집을 돕기 위해 총 20여 개국에 수출지원 해외 서포터스를 구축했다. 이들은 현지의 시장상황 및 산업분석, 현지 주요 이슈와 같은 양질의 국가별 시장정보들을 지역 기업들을 위해 전하고 있다. 영남일보는 지역 기업만이 아닌 지역민 전체를 위해 블로그나 페이스북보다 더 친절하고, 학술지나 논문보다 정확한 해외 정보를 매월 1회 지면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


필리핀 유명 프랜차이즈 졸리비 판매 아침식사. <경북프라이드기업 CEO협회 제공>

필리핀 유명 프랜차이즈 졸리비 판매 아침식사. <경북프라이드기업 CEO협회 제공>

필리핀은 최근 몇 년간 꾸준한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빈곤과 영양 불균형이라는 복합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는 개발 단계의 과도기적 현상을 넘어, 장기적으로 국가 경쟁력을 제약할 수 있는 구조적 위험으로 인식되고 있다.


세계은행은 매년 7월1일을 기준으로 전년도 1인당 국민총소득(GNI)을 집계해 각국을 소득 수준별로 분류한다. 2024년 기준 필리핀의 1인당 GNI는 4천470달러로, 고중소득국 기준선(4천496달러)에 단 26달러가 부족해 저중소득국으로 분류됐다. 필리핀 정부가 오랜 기간 '고중소득국 진입'을 국가적 과제로 제시해왔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는 정치·사회적으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필리핀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전체 인구의 15.5인 1천754만명이 빈곤층으로 분류됐다. <필리핀 통계청 제공>

필리핀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전체 인구의 15.5인 1천754만명이 빈곤층으로 분류됐다. <필리핀 통계청 제공>

◆태국·인니 이어 베트남도 추월 눈앞


다른 아세안 주요국과 비교해도 필리핀의 소득 수준은 여전히 낮은 편이다. 2024년 기준 1인당 국민총소득은 말레이시아 1만1천670달러, 태국 7천120달러, 인도네시아 4천910달러로 세 나라 모두 고중소득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베트남은 4천490달러로 필리핀과 같은 저중소득국 범주에 속하지만, 제조업 중심의 수출 구조와 적극적인 산업정책을 고려할 때 필리핀이 단기간에 이 격차를 좁히기는 쉽지 않다.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봐도 격차는 뚜렷하다. 2023년 1인당 GDP는 말레이시아 1만2천90달러, 태국 7천335달러, 인도네시아 4천919달러인 반면, 필리핀은 3천906달러에 불과해 이들 국가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필리핀 빈곤칭 기사 캡처. <경북프라이드기업 CEO협회 제공>

필리핀 빈곤칭 기사 캡처. <경북프라이드기업 CEO협회 제공>

◆낮은 빈곤 기준에도 빈곤층만 1천700만명


필리핀 통계청(PSA)에 따르면 2023년 전체 인구의 15.5%에 해당하는 1천754만명이 빈곤층으로 분류됐다. 이는 2021년 대비 2.6%포인트 감소했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가구 단위로는 전체 가구의 10.9%에 해당하는 300만 가구가 빈곤 가구로 조사됐다. 5인 가족 기준 월 1만3천873페소(약 250달러) 이하의 소득으로 생활하는 경우 빈곤층으로 분류된다.


극빈층도 적지 않다. 전체 인구의 5.9%, 즉 162만 가구는 월 9천550페소(약 170달러)조차 벌지 못해 기본 식품 구매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들 가구는 대부분 비공식 경제에 종사하거나 농업·어업 등 생산성이 낮은 1차 산업에 집중돼 있다.


지역별 격차는 더욱 심각하다. 방사모로 자치구(BARMM)의 빈곤율은 37.2%에 달하는 반면, 수도권은 3.5%에 불과하다. 이는 단순한 소득 격차뿐만 아니라 보건·교육 등 사회 기반 서비스에서 지역 간 편차가 크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필리핀 정부가 설정한 빈곤선은 국제적 기준에 비해 지나치게 낮다는 지적을 받는다. 2023년 정부 빈곤선은 1인당 하루 92.49페소(약 1.67달러)에 불과했으나, 세계은행의 국제 빈곤선은 3.65달러(2023 PPP 기준)로 책정됐다. 민간 연구자와 비정부기구(NGO)들은 필리핀 정부가 빈곤 규모를 실제보다 축소하고 있으며, 이는 정책 실효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라고 비판한다.


2024년 기준 필리핀의 1인당 GNI는 4천470달러로 집계됐다. <경북프라이드기업 CEO협회 제공>

2024년 기준 필리핀의 1인당 GNI는 4천470달러로 집계됐다. <경북프라이드기업 CEO협회 제공>

◆급증하는 비만과 사회적 부담


빈곤과 영양결핍이 심각한 가운데, 역설적으로 비만의 급속한 확산이라는 또 다른 보건 위협에 직면해 있다. 2025년 현재 성인 비만율은 38~40% 수준으로 추산되며, 2030년에는 3천400만명 이상이 과체중 또는 비만 상태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연평균 비만 증가율은 성인 4.6%, 아동 6.9%로 아세안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필리핀 남성 비만 인구는 100만명 미만이었으나, 2030년에는 300만명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같은 기간 여성 비만 인구는 150만명에서 400만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처럼 한 국가 내에서 빈곤과 비만이 동시에 확산되는 현상을 '영양이중부담(Double Burden of Malnutrition)'이라 한다. 필리핀은 이러한 '영양이중부담'이 개인과 가구 단위에서 모두 나타나는 대표적 사례다.


비만 증가는 이미 사회·경제적 부담으로 이어지고 있다. 2021년 한 해에만 비만 관련 질환으로 필리핀에서 조기 사망한 사람이 3만명을 넘어섰다. 당뇨병, 심혈관 질환, 고혈압 등 만성질환 발병률이 빠르게 늘면서 의료 재정 부담도 확대되고 있다. 2035년까지 비만 관련 비용이 GDP의 2.4%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는 국가 경제 성장을 저해하는 구조적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다.


싱가포르의 Lifes Sweeter with Less Sugar 캠페인.<경북프라이드기업 CEO협회 제공>

싱가포르의 'Life's Sweeter with Less Sugar' 캠페인.<경북프라이드기업 CEO협회 제공>

◆단편적 조치에 비만 방지 정책 실효성 의문


필리핀 정부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2018년 설탕세(리터당 6페소)를 도입했다. 이 조치만으로도 향후 20년간 약 2만4천명의 조기 사망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비만 확산 속도에 비하면 이는 단편적인 조치에 불과하며, 정책의 강도와 종합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지속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빈곤 해소와 비만 억제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전략을 제안한다. 첫째, 빈곤선을 국제 기준에 맞게 조정해 실제 빈곤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고 정책의 실효성을 높인다. 둘째, 고당분 음료와 청소년 대상 패스트푸드 광고를 제한하는 등 식품 산업 규제를 강화해 소비 환경을 개선한다. 셋째, 학교 급식을 영양가 있는 식단으로 개선하고 신선식품 구매 보조금을 지급해 누구나 건강한 먹거리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넷째, 공원과 체육시설을 확충하고 안전한 보행·자전거 도로를 정비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신체 활동이 가능하도록 환경을 조성한다.


마지막으로, 아동·청소년 대상 건강 교육을 체계화하고 조기 검진 및 만성질환 관리 프로그램을 도입해 예방과 치료를 강화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 전략이 동시에 실행될 때 빈곤 완화와 비만 예방이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필리핀은 구조적 빈곤 문제와 빠른 비만 확산이라는 상반되지만 동시에 존재하는 이중 도전에 직면해 있다. 빈곤선 과소평가로 인해 통계가 실제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며, 비만 억제 정책은 여전히 단편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빈곤과 비만이라는 이중 부담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지 못한다면, 필리핀은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불평등과 재정 악화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포용적 성장, 식생활 개선, 지역 균형 발전, 보건 정책 역량 강화가 종합적으로 뒷받침되어야만 안정적인 고중소득국 진입과 지속 가능한 발전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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