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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태균 민족통일대구시청년협의회 회장. 사할린 한인을 위해 9년째 사할린에서 ‘대구의 밤’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올해는 대구에서 ‘사할린의 밤’을 처음으로 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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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18일 ‘사할린의 밤’ 행사에 초청된 사할린 한인 동포들이 팔공산 관광을 마친 뒤 단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민족통일대구시청년협의회 제공> |
지난달 18일 저녁, 대구 프린스호텔에서는 독특한 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일제시대 강제 징용으로 동토의 땅 사할린으로 끌려간 한인 1~2세 200여명이 참가했다. 박순옥 사할린 이산가족협회장, 김홍지 사할린 노인회장, 김외철 네벨스크시 한인회장, 김춘경 사할린 어린이창작협력회 ‘소망’ 회장, 배순신 새고려신문사장, 정순덕 사할린경제법률정보대학 부총장 등을 비롯해 안산·고령·인천 등지에서 온 영주귀국 동포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한국의 아리랑과 러시아 민요 카추샤가 한국어와 러시아어로 뒤섞여 흘러나왔고 덩실덩실 노래에 맞춰 춤을 추던 이들은 결국 하나둘씩 눈물을 흘렸다. 하태균 민족통일대구시청년협의회 회장이 사할린 한인을 위해 마련한 ‘사할린의 밤’ 행사다.
2007년 취임후 사할린서 ‘대구의 밤’
내년 10년째…지금껏 그곳 15번 오가
예산·인력 부족 늘 남에게 아쉬운 소리
행사 준비 때면 ‘이번이 끝’ 다짐 반복
막상 그분들 눈빛 보면 또 내년 계획을
“사할린의 밤은 왜 안하냐”는 질문에
지난달 어르신 초청 대구서 행사 성황
그들 삶·애환 담은 아리랑 곡 만들어
내달 사할린 행사 때는 공연할 계획도
청소년 세대 교류의 장 마련 구상 중
◆강제징용 70년, 애증의 조국
사할린. 일제 때 지명은 가라후토, 화태(樺太)다. 아이누어로 ‘자작나무의 섬’이란 뜻이다. 1905년 러일전쟁 승전의 대가로 북위 50도 이남, 사할린의 절반이 러시아로부터 일본으로 넘어왔다. 일본은 이곳에 공군 비행장, 해군기지 등의 건설 공사를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목재, 석탄 등의 보급기지로 삼기 위해서다. 식민지 개발을 위해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일본은 조선인의 강제징용을 통해 이를 해결했다. 당시 끌려온 조선인은 7만명을 넘었다.
1945년, 전쟁은 끝났고 사할린에 살고 있던 4만3천여명의 조선인들은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하지만 1946년 12월9일 체결된 미소협정에 따라 귀환 대상자는 일본인 포로, 일반 일본인으로 한정됐다. 일본은 일본 호적을 기준으로 일본인만 받아들였고 당시 조선 호적으로 편제된 조선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990년 한국과 소련이 수교하기까지 45년간 4만여명의 강제 동원된 조선인과 그 후손들은 사할린에 버려졌다. 세상은 그렇게 그들을 잊었다. 한인 1세 600여명을 포함해 3만여명의 사할린 한인의 ‘슬픈 역사’다.
이들에게 한국은 ‘애증의 대상’이다.
“모진 차별과 핍박에 고통받으면서도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살아온 세월이었다. 경북도 경산시 하양읍 XX번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또 들었던 고향집 주소와 일가 친척들의 이름. 너는 꼭 고향에 가라. 가서 내 한을 풀어다오. 그들의 부모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유언을 남겼다. 죽어서라도 찾아가고 싶은 그 곳, 만나고 싶은 그 얼굴. 그래서 광복이 되면 갈 줄 알았다. 죽기 전엔 갈 줄 알았다. 뉴스에서 나날이 발전하는 고국의 소식을 들을 때면 덩달아 기뻤다. 이제나 저제나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 하지만 고국은 그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서럽고 원통했던 세월을 대한민국은 외면했다. 그 사이 강제징용 1세대들은 하나둘씩 세상을 떠났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왔던 70년 전 그날, 철저히 외면당하는 지금, 그렇게 고국은 그들을 두 번 버렸다.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적십자 등을 통한 정부차원의 모국방문이 없진 않지만 대부분 일회성 행사에 그치고 있다. 사진 찍고 선물 주는 보여주기식 행사를 원하는 게 아니다. 정치인들이 앞다투어 현수막 걸고 악수하며 사진찍고 돌아가는 행사로 이들에게 더 큰 상처만 남았다. 고국의 사랑이 누구보다 고팠던 이들이다.”
◆왜 사할린의 밤은 안 하노?
하 회장이 대표를 맡고 있는 민족통일대구시청년협의회는 2008년부터 사할린에서 매년 ‘대구의 밤’을 열어왔다. 1995년 단체와 MOU를 맺고 함께 사업을 추진하던 경북대 교민연구회에서 러시아 동포 관련 세미나가 열렸다. 당시 단체 회장이던 이태용 회장은 토론자로 행사에 참석했다. 그때 러시아 한인에 대한 실태를 처음 전해들었다. 이듬해인 1996년 단체는 사할린 한인회와 자매결연을 하고 30여명의 대표단을 사할린으로 보냈다. 첫 방문 이후 사업은 중단됐다. 비용 때문이었다. 잊혔던 행사가 다시 시작된 것은 하 회장이 2007년 취임하면서부터다. 2008년 8월 하 회장은 사할린에서 다시 행사를 시작했다.
“경북도 경산시 용성, 자인, 와촌에서 오신 분들이 엄청 많았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같았다. 고향에서 왔다고 그렇게 기뻐하셨다. 한 사람 한 사람 꼭 잡아주던 그 손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이렇게 첫 인사를 했다. ‘사할린에 내 할아버지, 할머니가 여기 계신다는 마음으로 왔다’고. 그 마음으로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이제는 8월이 되면 어르신들이 먼저 행사를 기다린다. 지난해 대구의 밤을 마칠 때 한 할머니가 ‘왜 사할린의 밤은 안 하노’라고 말씀하셨다. ‘할매, 할 게요.’ 얼떨결에 그렇게 대답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번에 사할린의 밤을 열고 어르신들을 한국에 초청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행사가 내년이면 10년째다.
“행사를 준비할 때마다 어금니를 꽉 깨문다. ‘이번이 끝이다’라고 늘 다짐한다. 예산도 인력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늘 돈을 빌리거나 협찬을 부탁하러 다녀야 한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행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 비행기에서는 이미 머릿속으로 내년 계획을 짜고 있다. 사할린에서 행사를 하면 너무 즐겁고 기쁘다. 그 분들의 눈빛을 보면 다시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매년 8월에 가다가 한 번은 대학에서 페스티벌 형식으로 행사를 해보자고 해서 10월에 행사를 하기로 한 적이 있었다. 8월 초에 사할린에서 연락이 왔다. 올핸 안 오냐고. 그래서 그 해엔 8월과 10월 두번 행사를 했다. 그렇게 지금까지 사할린만 15번을 오갔다. 팔자요, 운명이라는 생각이다.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은 이 분들의 희생이 바탕이 된 것이다. 대한민국, 대구의 청년으로서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보람 있다.”
내년 10년째 행사에 거는 기대도 크다. 첫 행사 때 학생으로 공연에 참가했던 한인 청소년들이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 행사에 힘을 보태고 있다. 우리와 똑같은 모습이지만 우리말과 문화에 서툰 그들이 할아버지, 아버지의 나라라며 그 문화를 사랑하며 배우고 있다. 이들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겠다는 것이 하 회장의 생각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사할린에 관심을 갖고 행사에 함께 참여하도록 하는 것도 과제다. 올해 행사를 준비하면서는 SNS로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 주부, 회사원, 자영업자 등 나이도 직업도 다양한 3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행사에 힘을 보탰다. 하 회장은 이러한 작은 물결이 더 큰 울림으로 되돌아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3~4세대 교류의 장 마련하겠다
하 회장은 사할린 한인 역사관 건립의 필요성에 대해 목소리도 높였다.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이리저리 부탁해봤지만 ‘표도 없는데 뭐하러 왔냐’ ‘사할린에만 동포가 있냐’는 등의 모진 말만 들었다. 힘들고 어렵게 살았지만 내 후손들은 사할린에서 한인으로서 존중받고 가치있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는 것이 어르신들의 바람이다. 역사관을 건립해 우리 민족의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하고 그곳에서 우리말과 우리 문화를 지속적으로 가르치고 계승, 발전시키고 싶다는 사할린 동포의 소박한 바람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사할린에 강제 징용된 사람의 70~80%가 경상도 사람이다. 우리 동네의 이웃과 사촌들이 대부분 끌려간 셈이다. 내 할아버지 대신 끌려간 것이다. 부채의식 가져야 한다. 매년 사할린을 방문하는 이 사업이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연속성을 갖고 행사를 하는 것이 힘들지만 올해 사할린의 밤 행사를 계기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사업을 이해하고 힘을 모아주었으면 좋겠다. 매년 연례적으로 행사를 치러온 회원들도 올해 행사를 통해 사할린 사업의 중요성과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참여의식도 높아졌고, 고생한 보람이 있다. 작은 목소리지만 진정성을 인정받은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사업은 성공한 것이다. 사할린 동포들의 수십년에 걸친 한과 눈물에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길 바란다.”
올해 8월 사할린에서 열리는 대구의 밤 행사에서는 사할린 동포의 삶과 애환을 아리랑 곡으로 만들어 공연을 할 예정이다. 이해숙 명창이 만든 이 곡에는 사할린 동포들의 삶과 애환과 눈물과 희망이 그려진다. 박수치고 좋아할 어르신들의 얼굴이 벌써부터 눈에 선하다. 3~4세대 청소년과 대구지역 청소년들이 교류하는 장도 새롭게 마련해 볼 예정이다. 그렇게 하 회장은 지난 9년을 그랬듯, 올해 8월을 또 기다린다.
글=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사진=손동욱기자 dingdog@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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