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51년 간 고장난 가전제품에 생명을 부여해주면서 전기전문가로 살아온 강연석 사장. 작업장은 비록 어둑하지만 그의 여든다섯해를 기억하는 눈매만은 여전히 초롱하기만 하다. 한없이 시달린 그의 손은 어느새 나무 작업대를 닮아버렸다. |
삶이라는 것. 그게 이마 주름살에 고스란히 박혀 있는 것이겠지만. 하지만 난 그 삶이 손금에 더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고 믿지. 난 얼굴을 갖고 산 게 아니었어. 오직 이 두 손을 갖고 아내와 5남매를 먹여살렸지. 그 시절 아버지는 다 그랬어야만 했어. 밥벌이란 참 숭고한 일이라 생각해. 그 밥벌이에는 우열이 없지. 그런데 지금 세상은 말이지, 모두 괜찮은 밥벌이만 갈구하잖아. 괜찮은 밥벌이가 딱히 있다고 믿는 세상은 정상이 아냐. 자기 길(밥벌이)을 찾으면 그게 성공이지. 가장 좋은 밥벌이?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야 돼.
세상은 항상 변하지. 한때 불야성의 교동전자상가(이하 교동상가)도 요지부동이라면 그건 사리에 맞지 않지. 교동상가도 자기 시절이 있었어. 하지만 그게 수백년, 수천년 영속되길 바라는 건 탐욕이지. 이제 교동상가는 분명 호시절은 아니야.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건데, 그렇다고 유명무실한 것도 아니지. 아직도 가전제품을 고쳐가면서 자신만의 추억을 고이 간직하려는 아날로그 마니아들도 있어. 그들이 드문드문 해묵은 제품을 갖고 어둑하기 이를 데 없는 동굴 같은 내 가게로 찾아오지. 그럼 난 납을 덧대 끊어진 회로를 다시 이어주고, 너무 낡은 건 새로운 부품으로 교체해주고, 찌든 때도 염산 등으로 벗겨주고…. 그렇게 죽었던 제품은 내 손에서 환생하지.
새것만큼 낡은 것들도 자기 주장을 하고 있으니 나 같은 사람도 존재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단언컨데 난 은퇴는 없어. 암 없지. 어쩜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곰보처럼 생긴 이 2m 남짓한 작업대에서 임종한다면 난 세상에서 가장 복많은 사람이 될거야.
한때 서울 세운전자상가와 함께 대한민국 양대 전자상가로 유명했던 교동상가. 세운상가가 용산전자상가한테 명맥을 뺏겼듯 교동상가도 1994년 생겨난 북구 유통단지 내 전자관으로 인해 성장동력원을 상실하게 됐지. 구세대는 신세대를 이길 수 없는 것이지만 부모 없이 어찌 자식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 구세대 없이 신세대도 없으니 이 늙은이의 지난 경험담도 후학들에겐 분명히 도움이 될 거라고 믿어.
좀 부풀려 말해 내 손 안에 대한민국 가전제품의 어제와 오늘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 난 당신의 조부모와 부모가 사용했던 그 다양한 모델의 라디오·TV를 모두 수리해왔지. 그래, 내가 보여줄 게 있어. 50년 전 교동상가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내 곁에 입양됐던 추억의 미국 시어스(SEARS)가 제작한 9인치 흑백TV야. 참으로 기능이 단순해. 중파 구실을 하는 UHF, 단파 구실을 하는 VHF, 그리고 뒷면에 보면 흑백 음영의 강도를 조절하는 레버 두 개. VHF 채널은 2부터 13번까지만 있지. 9번은 KBS, 11번은 MBC였겠지. 지금 고화질 TV에 등장하는 채널은 수백개가 넘지. 실물보다 더 또렷하고 밝게 보이는 화면이 솔직히 내겐 너무 부담스러워. 다른 모델의 가전제품은 거의 내 품을 다 떠났지만 이 놈만은 여태 내 작업대에 목각인형처럼 앉아 날 응시하고 있지.
손님이 없을 땐 가끔 내 손을 요모조모 세밀하게 뜯어봐. 그렇게 험할 수가 없어. 젊은 시절 피부에 흐르던 그 윤기는 증발된지 오래. 반세기 동안 계속된 납땜. 그 후유증으로 짓물러버린 엄지손가락에는 밴드가 떨어질 날이 없어. 겨울철이면 더 옹이처럼 변하는 내 손이 어떨 때는 고향 뒷산 낙락장송 가지 같아.
내 이름은 강연석. 올해 여든다섯. 전남 나주군 산포면 송림리에서 1932년 태어났지.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어. 그 무렵 민초들의 삶이란 게 거의 찢어질 듯 아팠지만 난 비교적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지. 다른 친구보다 3년 늦게 출생신고를 했어. 당시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지. 첫돌 전에 홍역 등 갖은 병으로 죽는 애들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야. 이제 전기 얘기를 할 차례인 것 같아. 전기(電氣)는 분명 내 삶의 강력한 전기(轉機)였지.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