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상업 사이’…방천시장을 떠나 북성로에 다다르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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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3-23   |  발행일 2018-03-23 제34면   |  수정 2018-03-23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미술가 손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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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복의 작업실 벽에는 그가 제작한 구겨진 철판에 그려놓은 자화상이 처연하게 걸려 있다. 그는 자신의 반은 상업, 나머지 반은 예술에 감염돼 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석판으로 만든 자화상으로 얼굴을 살짝 가리고 사진촬영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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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공소, 아니 철공소 같은 손영복 작가의 작업장 내부. 조각작업의 특성상 이런저런 연장과 도구가 많다. 작업이 없으면 이 공간은 예술쟁이 파티장으로 변한다.

2009년 4월까지만 해도 방천시장은 ‘말기암 환자’. 도무지 소생할 가능성이 없었다. 그 다음달 방천시장 예술프로젝트 ‘별의 별별 시장’이 론칭된다. 상인과 예술가의 동거가 시작된다. 그리고 ‘김광석 다시그리기 길’ 사업이 시작된다. 당시 이정호 경북대 건축학과 교수가 총감독이었고 이창원은 총괄기획, 예술감독은 나였다. 참여작가만 19명. 수성교~송죽미용실 350m 중 90m 구간에 김광석벽화를 그렸다. 내 작업실은 신천 옹벽이 막아선 골목길 안에 있었다. 이창원이 내 작업실에 놀러 왔다. 둘은 김광석 팬이다. 술을 마시던 중 이창원이 “김광석길을 그리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 아이디어가 지금의 김광석벽화길로 비상한 것이다. 처음엔 난색을 표하는 이가 많았다. 특히 공무원들은 누구 이름을 걸고 길을 만드는 것에 큰 부담을 느꼈다. 2010년 11월 벽화길이 완공된다. 그때 난 처음으로 나를 대표할 수 있는 상징물을 김광석길 초입에 세팅한다. 방천시장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 예술도 없었을지 모른다. 계명대 대명동 캠퍼스 근처 사글세 방에서 종일 술만 마시고 있을 때 내게 봄처럼 다가선 고마운 선배가 있다. 바로 방천시장에 먼저 터전을 마련한 정세용이었다. 그가 힘을 내라면서 30만원을 주었다.

형편 어려운 집안의 장남, 그림에 소질
예고진학 후 조소에 매력…새로운 감동의 에너지
피카소‘늙은 기타리스트’로 조각, 주목도 받아

첫 개인전 후 월세도 못내는 현실
하고싶은 작품위해 하고싶지 않은 작품할때도…|

방천시장 한켠 10만원짜리 전세 작업실
중구청 대형간판 계획, 김광석 동상 만들자고 역제안
벽화길 세번의 리모델링…함께한 작가들 열정 못잊어

더이상 해야 할 일이 없기에…떠날때는 말이 없어야
‘북성로가 복성로 될때까지’…니나노예술가협 탄생
방천시장에 대한 아쉬움, 개인전도 열어



◆달동네의 유년기

칠성시장 부근에서 태어났다. 신천대로 생기기 전 신천동의 그 달동네, 막막한 민초들의 한숨 같은 것, 진흙밭, 그리고 전국을 떠돌던 서커스단에 대한 기억도 새록새록 피어난다.

난 키가 무척 크다. 190㎝. 거구 집안 탓이다. 하지만 예술과는 연관이 없는 집안이다. 장남으로 태어났다. 예술가에겐 ‘형벌’이랄 수밖에. 아버지는 칠성시장에서 청과물을 팔았다. 아버지는 일찍 내 팔자를 눈치챈다. 어느 날 “너 하고 싶은 거 해라”고 내 예술적 감수성을 인정한다. 단지 장사꾼만은 되지 마라고 당부했다.

내 첫 그림은 ‘호돌이’. 88년 서울올림픽 직전 유치원시절에 그 그림 때문에 큰 상을 받았다. ‘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는 잠재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야구 명문 대구중으로 간다. 야구부 유혹이 있었지만 나와 상관이 없었다. 수업시간에 포스터를 그렸는데 미술선생이 괜찮다고 해서 전국 공모전에 보냈더니 덜컥 장관상을 타게 된다. 당시 학교 분위기는 무인 스타일, 난 혼자 ‘문인 스타일’로 가고 있었다. 다들 내 그림 때문에 놀란다. 친구들은 ‘남자도 그림 그려도 된다’는 걸 나를 통해 자각하게 된다.

경북예고로 진학을 하게 된다. 난 점차 ‘조소(彫塑)’에 매력을 느낀다. 평면에서 입체를 뽑아낼 수 있다는 게 정말로 충격이면서 새로운 감동의 에너지로 다가선다. 종일 조소에 빠진 덕분인지 경북대 미술대학에 진학한다.

◆창작과 반복의 사이

고교 때 얻은 재능은 대학에 오자 허물어진다. 반복적으로 스킬만 잘 답습하면 성적이 좋아지고 인정도 받을 수 있었던 고교시절. 난 어느 순간 입시미술에 가장 최적화돼 있었다. 예술이란 게 폼이 아니라 어마무시한 창작의 싸움터라는 걸 절감하게 된다. 각본에 의한 대련은 실제 싸움과 다른 법. 난 ‘진검예술’에 대한 호흡을 익혀야만 했다.

예술(미술)이 뭔지를 알고 싶었다. 선배를 답습하고 벤치마킹을 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나만의 시스템, 나만의 각도, 나만의 안목, 나만의 오브제 등이 있어야 하는데…. 졸업 무렵이었다. 어느 길을 선택할까? 대학원, 아니면 작가생활? 작가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그걸 학과 교수도 어찌 해줄 수가 없었다.

공공미술은 작업장에서 모든 걸 배운다는 말도 있다. 일반 물감만 갖고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공공미술은 제약조건이 다르다. 일단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건의 물성에 정통해야 한다. 나무, 돌, 철, 플라스틱, 종이…. 끝도 없다. 건축재료학에도 정통해야 한다. 유무성페인트, 래커, 바니시, 오일스테인 등 도료학에도 눈을 떠야 한다.

◆그림 같은 조각, 조각 같은 그림

각종 플라스틱의 물성을 회화적으로 특화시켜주고 싶었다. 졸업후 첫 개인전을 앞둔 시점이었다. 회화와 조각을 연결시키고 싶었다. 불멸의 명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내고 싶었다. 평소 고생하면서 살아가는 한 형님의 표정을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그려진 그 구름 위에 얹어주었다. 소재는 FRP(섬유강화플라스틱). 금형틀 없이 모양을 낼 수 있었다. 나는 인상파적 조각을 그려내고 싶었다. 유리거울처럼 반들거리고 매끄러운 표면은 싫다. 거친 호흡을 표면에 심어주고 싶었다. FRP 위에 두툼한 붓터치가 강조된 ‘마티에르(질감)’다. 고흐에 이어 모네의 명작도 손영복식으로 녹여냈다.

1회 개인전은 2008년 중구 봉산동 갤러리로에서 열렸다. 20여점 깔았는데 피카소가 입체파로 넘어오기 전 그린 ‘늙은 기타리스트’를 조각으로 형상화한 것이 가장 주목받았다. 기타를 첼로로 바꾸었다. 찢어진 옷을 입은 남루한 첼리스트로 성형했는데 기존 FRP에서 브론즈로 재질을 바꾼다. 그 작품은 어쩜 내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그건 팔기 싫었다. 내 ‘자존심’이었다. 그땐 돈 얘기가 나오면 작가를 무시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젠 돈이 뭔지 잘 안다. 작가는 하고 싶은 작품을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작품도 만들어야 된다. 그게 이 바닥에 나온 사람들의 운명이다. 경북대 치대병원, 이시아폴리스 섬유패션타운 로비, 칠성동 롯데마트 앞에 가면 내 작품이 있다.

◆첫 개인전 후 혼란 가중돼

첫 개인전을 하고 나면서 난 더 미궁 속에 갇혀버린다. 대명동 계명대 캠퍼스 근처에서 암약했다. 월세 내기조차 힘들었다. 이런저런 작업에 동참했지만 거기서 번 돈은 생활비로 다 소진해 버렸다. 세상을 뒤흔들 작품이 떠올라도 그걸 가능케 해주는 현실이 아니었다. 부모와 소통을 끊었다. 작업실에서 종일 잠만 자고 술로 소일을 했다. 패닉상태였다. 악령이 날 흔들기 시작한다.

그런 어느 날 한 선배가 찾아왔다. 조각가 정세용이었다. 그가 급한 불을 끄라면서 돈을 건넸다. 그렇게 해서 난 사지에서 나와 방천시장 한편에 10만원짜리 전세 작업실을 구하게 된다. 난 가장 막내로 참여해 처음엔 ‘마중길’이란 제목으로 방천시장 바닥에 노란 칠을 했다. 신천의 강물을 노랗게 형상화한 것이다. 그때 중구청에선 대형 간판을 세우려고 했다. 내가 역제안을 했다. 간판보다 동상을 만들자고. 김광석의 형(김광복), 그리고 임종진 사진작가의 도움을 받아 정말 많은 김광석 사진을 몇주 동안 보고 또 봤다. 이거다 싶은 이미지를 집어내기 위해서다. 언젠가 서울 학전소극장 앞에 부조형태로 설치된 김광석 조각을 본 적이 있다. 그때 자극 덕분에 결국 지금의 조각상이 가능해진 것 같다. 앉은 조각상에 이어 야외공연장 앞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전신의 김광석 동상을 세웠다.

벽화길은 모두 3번 리모델링됐다. 작업할 때 만난 잊을 수 없는 작가가 있다. 그 중 아직도 많은 이들의 포토존이 된 김광석 얼굴 그림이 있다. 지정현이란 작가의 작품인데 그녀는 그걸 완성시키기 위해 밤낮 소주를 마시면서 지우고 또 그리고 했다. 경북대 미대생이었던 이슬기는 오토바이를 탄 김광석을 그렸다. 우린 그런 사람의 열정을 기억해야 한다. 관광객의 수만 중요한 게 아니다.

◆방천시장을 떠나다

어느 날부터 작가들이 방천시장을 떠났다. 나도 거의 마지막으로 떠난 것 같다. 하지만 보도와 달리 우리가 밀려난 건 아니다. 상인과 주민들은 의외로 우리에게 우호적이었다. 땅값이 오르는 걸 탓할 수도 없다. 상업적인 시설이 늘어났다고 그 공간이 죽었다고 볼 수도 없다. 상인들 역시 작가를 보는 안목이 있었다. 우리더러 나가라고 한 사람은 없었다. 우리가 그 공간에서 더 이상 해야 될 일이 없었기에 다른 곳으로 간 것이다.

2015년 봄에 짐을 쌌다. 떠날 때는 말이 없어야 한다. 김광석길을 위한 장기적 컨트롤 타워가 있었다면 지금의 김광석길과 확연히 다른 그림이 나왔을 것이다. 소극장 1천회의 전설. 그런 김광석에게 맞는, 연중무휴 통기타 상설공연이 가능한 ‘김광석기념관’이 절실했다. 그걸 위해 유족들도 유품을 기꺼이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김광석커피’까지 구상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방천시장 작가협의회의 생각은 동사해버렸다.

◆손영복의 북성로 예술조합시대

북성로로 왔다. 누군 ‘북성로가 복성로로 변할 때까지’라며 날 응원했다. 그해 10월 난 내 작업장에서 ‘니나노 파티’를 열자고 제의했다. 지쳐 있는 작가들에게 새로운 위안이 필요했다. 난 나름 마당발이다. 그렇게 칩거형도 아니다. 인연을 나누고 연결해주고 싶다. 그래서 모두에게 영광이 있으면 좋겠다. 미술가, 음악가, 무용가, 사진가 등 여러 장르의 예술쟁이 100명이 모였다. 전업작가로 살아남을 수 있는 묘수를 서로에게 전수했다. 그렇게 해서 ‘니나노예술가협동조합’(회장 김건예)’이 탄생된다.

북성로로 온 건 작업 재료를 구하기가 너무 용이해서다. 가끔 나올 수 없는 각도의 작업도 근처 철물점 기술자를 만나면 단번에 해결된다. 도처에 고수가 숨어 있다.

봉산문화회관에서 2회 개인전을 했다. 방천시장에 대한 아쉬움을 조각화했다. 낡은 집을 층층이 쌓아 5m 빌딩으로 만들었다. 과거의 축적 속에 미래가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다. 2012년 봉산문화거리 갤러리제이원에서 ‘WICKED CANVAS’란 주제로 3회 개인전을 했고 이때 내 데드마스크 같은 구겨진 자화상 철판 액자를 만들었다. 그걸 늘 잠옷처럼 벽에 걸어놓고 나태할 때마다 바라본다.

지금은 4회 개인전을 구상 중이다. 평생 칭찬 한번 들어보지 못한 자들의 ‘영광’을 재현해주고 싶다. 어느 날 폭주족이 튜닝한 기막히게 멋진 오토바이를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예술이었다. 그들의 섬세한 감수성은 폭주족이란 고정관념 때문에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일상에선 그런 게 얼마나 많은가? 음지가 양지고 양지가 음지 아닌가. 버려진 술병, 담배꽁초 등을 깔아놓고 ‘정물화’란 제목도 붙여 볼 것이다. 세상을 비틀어놓고 싶다. 그러다가 별일이 없으면 다시 내 작업장으로 꾼들을 부를 것이다. 난 ‘시벌파티’라는 걸 벌여봤다. 누가 10월을 ‘시벌’이라 발음하는 것에 착안해서 만든 거다. 작년에는 ‘시비럴(11월)파티’도 짰다. 블루스 기타리스트 지구와 김종락, 포크싱어 김강주와 구본석 등이 흥을 주고 갔다. 어떤 밤이면 텅 빈 대안동의 카바레를 통째로 빌려 철야 페스티벌을 벌여도 봤다.

전업과 실업은 한 끗 차이. 어느 날 ‘내 작품에 새로움이 없다면?’. ‘시민으로 돌아가는 날’이겠지 뭐!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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