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직장전선은 時調정신의 전위”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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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2-06   |  발행일 2019-12-06 제33면   |  수정 2019-12-06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시조시인 박기섭
20191206
유교에 갇혀 있던 정형시조를 21세기 모바일 세상에 맞도록 실험과 파격을 가하고 있는 시조시인 박기섭. 소의 우직한 걸음으로 느릿하게 일상의 흔적을 뒤지지만 그 행간에는 항상 독수리의 눈매 같은 시적 안목이 도사리고 있다.

외할매 가슴이 하늘보다 더 넓다고 생각하던 어느 사내의 유년이 있었다. 그 유년에 박힌 묘한 정조(情調)는 그 사내를 훗날 시조시인으로 빚어낸다. 박기섭. 그렇다. 내 이름은 박기섭. 할매 가슴은 이제 시조가 돼 버렸다. 그래서 시조는 내게 하늘 이상의 공간이다. 고향의 동의어라고 할 수 있는 할매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첫사랑의 황홀, 그리고 직장생활의 신산스러움, 마지막엔 골동(骨董)의 계곡에 다다라 각기 다른 세월의 마디가 혼융되면서 시조란 하나의 영토를 겨우 품을 수 있었다.

한국 유학의 태동과 함께한 시조. 하지만 조선의 폐망, 그리고 분단의 아픔, 이념의 갈등 등을 겪어오면서 새로운 옷을 입게 됐다. 나도 그 옷을 만드는 데 올인했다. 일제강점기 가람 이병기는 시조혁신론, 그리고 이호우는 시조를 국민시의 정형으로 발전시켜야 됨을 주장한다. 나도 민병도·문무학·이정환·노중석 등과 함께 1980년대 시조실험을 리드했다.

“삶속에 숨어 보이지 않는‘사각지대 미학’
 식솔 위해 짊어진 속세가 내 시조의 골격
 쟁취되는 도달점이 아닌  ‘그 너머’ 존재
 절정의 문장도 아닌 삶에대한 어떤 태도”

 
나도 그렇거니와 모든 시는 ‘유아독존(唯我獨尊)’이다. 정신의 출처인 동시에 사유의 귀소다. 지상에 완성된 시는 없다. 그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만 있다. 문제는 삶 아닌가. 인생이란 테두리 안에 삶밖에 없었다면, 나도 일찌감치 삶을 정리했을 것이다. 삶 이상의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삶이 삶뿐이라면 뭣하러 살겠는가. 값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치’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일상에 매몰된 자는 절대 볼 수 없는 야수의 송곳니 같은 사각지대의 미학이 삶 속에 숨어 있다. 나는 그 미학을 ‘신의 영역’이라고 믿는다. 도저한 정신의 예술가는 목숨을 지불해야 되는 그 영역으로 들어가려 환장한다. ‘신탁(神託)’ 때문이다. 여기 지금 이 시간에 만족한다면, 그 신탁도 무용지물. 극복이 아니라 초월일 것이다. 난 그걸 북극성처럼 항상 겨냥했다. 식솔을 위해 35년간 직장인이란 속세의 거죽을 짊어졌다. 속세는 벗어나는 게 아니라고 믿었다. 속세가 오히려 승부처였다. 직장이란 간단치 않은 제약조건이 내 시조의 골격을 야무지게 조탁시켰다.

처음에는 시조를 낚으려고 그 과녁을 궁사처럼 노려봤다. 하지만 그건 허사였다. 시는 쟁취되는 게 아니었다. 도달점이 아니라 ‘그 너머’라는 걸 알았다. 절정의 문장이 아니라 삶에 대한 어떤 ‘태도’라는 걸 알았다. 현학과 수사로 무장한 시조들은 나부랭이로 폄훼됐다. 그놈들은 잠시 눈을 부릅뜨려고 하다가 자멸해버린다. 그래서 난 겨우 알았다. 신탁의 대장정 속에서는 묘수가 없다는 걸. 내가 가장 넘기 어려운 고비였다. ‘나’란 존재가 우주의 막장이란 사실도 알게 됐다. 하지만 자연이 구원투수로 등장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게 허물어진다. 삶이 자연이란 버전으로 환원됐을 때 너머를 향하는 미학이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분명 그 미학은 하나의 ‘마법(魔法)’이다. 마술은 아니다. 그 마법은 삶에 굴복한, 삶에서 아무런 의미를 느낄 수 없는, 삶이 곧 형벌이 되어버린 자들의 가슴에 하나의 구원, 하나의 극치감으로 다가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걸 ‘카타르시스’라 명명했다.

‘이마에 먹을 넣고도 그런 줄을 몰랐구나 그런 줄을 모르고 오십년을 살았구나 황청동, 지상에 없는 저녁 길 끝 황청동.’

지난 1월 발행된 내 여덟번째 시집 ‘서녘의, 책’에 실린 ‘황청동’. 반세기 만에 획득한 내 시조의 첫발인 것 같았다. 내 시조의 밑그림이 시작된 데가 바로 황청동인 탓이다.

황청동을 만나기 전, 우선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마비정 마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6·25전쟁이 남긴 포연(砲煙)이 가난한 초가의 흙벽을 핥고 다니고 있던 1954년 음력 12월4일 나는 섣달배기로 태어났다. 지금도 멀거니 원경을 응시하는 내 시선에는 그날 뭇나무와 뭇풀을 초토화 시켜버린 설한풍의 기세가 박혀 있는 것 같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풍성한 덩치답지 않게 명징하고 골똘한 내 눈매를 무척 수상하게 여긴다. 그럴 때마다 내 눈매의 고향은 세상의 모든 우물일지도 모른다고 독백한다. 어쩜 소의 몸뚱이에 스며든 독수리의 눈매가 내 시조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시조의 묘법, 평이한 일상의 단어로 우보(牛步)를 걷지만 그 행간만은 비수처럼 고정관념의 숨통을 끊어놓는 것.

눈을 감으면 다시 카랑카랑하고 비릿한 고향의 바람이 만지작거려진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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