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만능의 세상, 자본이 인성을 더더욱 황폐하게 만드는 반(反)경학적이고 반(反)유학적인 이 시대, 공자 사상의 요체이기도 한 효제(孝悌)와 충서(忠恕)의 가치도 추락하고 말았다. 어디에 성인이 있고 어디에 군자가 있고 어디에 대인이 있겠는가. 두 명의 학인(學人)을 만나러 갔다. 남산골서당 남천 윤원돌 훈장(75)과 44년째 주역(周易) 연구가의 외길을 걷고 있는 중정(中正)서원의 이진수 원장(73). 대가를 바라는 맘을 감히 가질 수 없기에 그들의 가계는 더없이 빈한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냉엄한 시장경계에 순치된 세속인들이 그들을 찾아와 삶의 이치를 배우려고 한다. 희한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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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4년간 주역 연구의 외길을 걸어온 중정서원 이진수 원장이 주역의 이치와 경서의 정신이 현실 속에 구현되기를 바라며 제자들에게 신년 덕담을 칠판에 적어 놓았다. 천지비일월공곡 일월비지인허영(天地匪日月空穀 日月匪至人虛影)은 '천지도 해와 달이 없으면 자연이 살 수 없고 일월이 있어도 성현군자가 없으면 모두 허망하다'는 의미다. |
동구 신암동 강남약국 버스정류장 옆의 빌딩 4층에 남루하게 자리 잡고 있는 중정서원. 입구에 들어서자 검은색 두루마기 차림의 그가 인자한 웃음을 머금으며 반갑게 기자를 맞이했다. 경서를 오래 공부한 자한테서만 느껴지는 상서로운 기색이 얼굴에 잘 구존돼 있는 것 같았다. 29세 때 아산 김병호, 그리고 정역 전문가 학산 이정호 문하에서 공부를 했다. 1985년 주역의 맥을 잇기 위해 대구로 내려와 동인회·금란회를 거쳐 중정서원을 개원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경자년의 의미를 물었다. 그는 "그건 지엽말단의 사안"이라며 즉답을 회피했다. 그는 한 해의 의미보다 "우주변화의 기본 원리, 천하의 이치, 그리고 인간사의 이치를 아는 게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두 구절의 경구를 주었다. 천지비일월공곡 일월비지인허영(天地匪日月空穀 日月匪至人虛影), '천지도 해와 달이 없으면 자연이 살 수 없고 일월이 있어도 성현군자가 없으면 모두 허망하다'는 의미다.
정역팔괘지도, 문왕팔괘지도, 복희팔괘, 낙서지도, 하도지도 등 사면의 벽에는 주역 공부에 꼭 필요한 자료의 액자가 걸려 있었다. 이 서원은 상고사 시절을 유유자적하게 거닐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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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세 때 아산 김병호, 이어 정역 대가인 학산 이정호의 문하에서 주역을 배운 뒤 1985년부터 대구에서 주역을 가르치기 시작한 이진수 중정서원 원장. |
이 원장은 주역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을 했다. "천지인 삼재의 우주적 운행원리와 시스템이 소우주인 인간에 그대로 장착돼 있는데, 결국 주역은 인간이 천하에 살면서 어떻게 하면 자연의 운행원리에 순행하는지 가르쳐 주죠. 그래서 주역은 동서양 학문의 금자탑인 거죠.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 등을 배우고 재차 사서를 배우고 시경과 춘추, 예기, 서경을 거쳐 마지막에 주역에 도전하게 됩니다. 세속을 향한 성공의 욕망을 끊고 한평생 주역 외길을 가는 것도 인간 본성의 귀처, 그리고 우주의 변화원리를 알고 싶어했기 때문이죠. 아직 부족하지만 이제 진리의 빛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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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만물은 태극(太極)에서 발원되고 태극은 음과 양으로 나눠지고 그 음과양이 8괘(건·태·이·진·손·감·간·곤)와 오행(五行)으로 펼쳐지는데, 그 상호기운은 상생과 상극의 원리를 따르게 된다. 많은 종교가 서로 다른 말을 해도 근본은 동근(同根)이다. 벌어진 가지만 다를 뿐.
이 원장은 주역의 가르침이 가장 펼쳐지기 좋은 공간이 바로 한반도라 믿는다. 그걸 암시하듯 "우리는 81자의 천부경을 갖게 됐다"고 강조했다. "지식도 돈에 휘둘리게 되고 그럼 거기서 생긴 언어도 교언영색 될 수밖에 없죠. 바로 여기서 혹세무민이 발생해요. 저는 주역을 통해 그걸 최소화하고 싶습니다. 이 서원이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것도 다 그런 이유죠."
그는 화·목요일 서울로 가서 가르침을 주고 온다. 토·일요일 잠시 이 서원에서 강학을 한다. 오는 2월6일부터 대구향교에서 2년 과정의 새로운 주역 강좌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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