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0주년 영남일보 특별기획 1부-경북의 戰線 .3] 학도병 활약 빛난 포항전투

  • 김기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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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2-02 21:19  |  수정 2020-02-03
학도병 사투에도 포항은 적군 수중
고립된 3사단 결국 구룡포로 후퇴
연제근 결사대 희생 힘입어 다시 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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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한국군 부대 앞의 미군 병사들. 왼쪽부터 Henry A. Adams 일병, Oscar R. Hogan 기술하사관, Lawrence Grisson 이등병, Henry L. James 일병.<국사편찬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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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병사들이 포항 동쪽 안공마을에서 인민군과의 전투 전 훈련을 받는 모습.<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시작한 북한군은 동해안을 따라 남하해 포항 인근까지 침공했다. 포항은 항만과 철도, 육로의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동해안 최대의 병참기지였다. 특히, 포항 남쪽 6㎞ 지점의 영일 비행장은 美 제40전투비행대대가 주둔해 지상부대를 근접지원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포항이 북한군의 손에 넘어가면 경주, 울산까지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질 수 있었다. 대구와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기 위해서도 포항 방어는 매우 중요했다.
낙동강 방어선의 동부전선인 영덕, 포항, 기계, 안강 등에서는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수도사단과 육군본부 직할의 제3사단이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5사단과 제12사단, 독립 유격부대인 제766부대의 공세를 저지하고 있었다. 포항에는 국군 제3사단 후방사령부의 행정요원과 지원부대, 해군 포항경비부와 공군 포항지부대 1개 중대, 수도사단 학도의용대 출신의 학도병 71명 등 약 3천여 명의 병력만 있을 뿐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초기인 1950년 8월 중순부터 약 한 달 동안 포항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를 재조명한다.

◆적에게 넘어간 포항
포항시 북구 기계면은 낙동강 방어선의 중요한 거점으로 동해안에서 대구에 이르는 주요 도로에 위치했으며, 이곳이 적에게 넘어가면 인접한 경주까지 위험했다. 당시 안동 길안과 청송에서 방어전을 펼치던 국군 수도사단은 북한군 제12사단의 포위 공격에 의성으로 철수했다. 8월 5일 이후 청송군 일대는 광대한 공백 지대가 형성됐고 청송-기계 축선에는 국군 병력이 거의 배치되지 않았다. 험준한 산악지역의 공백 지대를 파고든 적은 청송, 죽장, 기계, 안강, 경주 축선으로 침투해 8월 9일 경주 방어의 요충지인 포항 기계를 점령한 데 이어 11일에는 포항까지 점령했다. 이로 인해 영덕 강구지역에서 북한군 제5사단의 남하를 막고 있던 국군 제3사단이 고립되고 경주도 위협을 받게 됐다.

◆펜 대신 총을 든 소년들
“어머님!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나는 2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저의 고막을 찢어 놓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제 귓속은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포항여중 전투에서 전사한 이우근 학도병(당시 17세·서울 동성중 3학년)의 품속에서 발견한 편지의 일부다. 故 이우근 학도병 등 71명의 학도의용군은 포항이 적의 손에 넘어가던 8월 11일 북한 정규군을 상대로 목숨을 걸고 싸웠다.
앞서 국방부는 전쟁 발발 한 달 뒤 7월 말 소년병들에게 귀가를 명령했다. 수도사단에도 81명의 학도의용군이 있었다. 수도사단장이던 김석원 준장이 8월 7일 국군 3사단장으로 부임하게 되자, 이 중 71명의 학도의용군은 9일 의성지구에서 김석원 사단장을 따라 포항으로 갔다. 이들은 10일 3사단 후방사령부가 있던 포항여중에 임시 대기했다. 주력부대는 영덕에서 북한군 5사단과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음에 따라 이곳에는 학도병과 수십 명의 행정병 뿐이었다. 학도병은 이날 M1 소총과 실탄 250발씩 새로 지급 받았다. 이날 자체 훈련과 총기 정비를 마친 뒤 자정이 넘어서 잠을 청했다.
11일 오전 4시쯤 소티재 방향에서 예광 신호탄과 함께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3사단 후방지휘부는 71명의 학도병에게 사령부가 있는 포항여중 방어 임무를 맡기고 행정병 60여 명으로 편성된 2개 소대를 학교 뒷산에 배치했다. 일부 병력은 보급품과 기밀문서를 후송했다.
날이 밝아오며 적군이 포항여중 정문 50m 전방에 오자, 학도병들은 일제히 사격했다. 기습을 받은 적군 200여 명이 피해를 당했다. 북한군은 잠시 당황했지만, 공격을 재개했다. 얼마 후 박격포 공격을 학교 주변에 집중했다. 오후 1시쯤 탄약과 수류탄이 동이 났다. 실탄 창고의 문을 부수고 약간의 실탄과 수류탄을 얻었지만 금세 떨어졌다. 사단사령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통신은 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소총에 꽂힌 대검뿐이었다. 전투는 백병전으로 이어졌지만 학도병들의 희생은 막을 수 없었다. 이날 오후 3시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71명의 학도병 중 47명이 전사하고 4명이 실종됐고 13명이 포로가 됐다. 이들이 11시간 가량 사투를 벌여 적의 포항시내 진출을 저지하는 사이 지원부대, 경찰, 행정기관 등이 안전지대로 철수할 수 있었다. 또한 군수품을 민간선박을 이용해 피해 없이 후송했고, 병기부는 보유 중인 노획 무기 중 일부는 땅에 묻고 나머지는 휴대해 구룡포로 철수했다. 무방비 상태에 놓인 포항 시가지는 적에게 피탈됐다.

◆국군 제3사단 독석동 철수전
김석원 제3사단장은 포항이 실함 됐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1개 연대와 2개 75밀리 포대로 포항 탈환을 결심하고 공격 준비를 지시했다. 그러나 사단장의 작전 의도를 들은 미 고문관 에머리치 중령은 무모한 작전이라고 피력했다. 사단장은 결국 진지를 사수하라는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명령에 따라 장사동에서 방어전을 계속하기로 했다.
하지만 462고지, 봉황산, 구계동 방어선상에서는 쉴 새 없는 교전이 벌어졌고, 15일 새벽에는 흥해 북쪽에서 북한군이 출현했다. 제3사단장은 적의 협공이 머지않아 가해질 것이라고 직감했다.
이런 가운데 육군본부는 포항 기계지구의 전황이 좀처럼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계동 월포동에 고립된 국군 제 3사단이 점점 곤경에 빠져들게 되자 미 제 8군과 협조한 후 제 3사단에 해상 철수 명령을 하달했다.
제 3사단은 15일 저녁 제 23연대를 지경동, 화진동에 재배치하고 그 엄호로 제 22연대를 철수 시켜 화진동, 독석동에 배치했다. 다음날인 16일 오후 9시 미 상륙 작전용 함정 LST 4척이 독석동 해안에 접안할 것이라는 육군본부의 전문을 받았다.
김석원 제3사단장은 해상철수를 극비에 부치고 치밀하게 움직였다. 기만 대책으로는 트럭 6대를 동원해 17일 자정부터 1시간 30분 동안 독석동~방화동 간 2㎞ 구간을 왕복 운행하면서 국군 증원병력이 상륙한 것처럼 가장하기도 했다. 다행히 해상철수는 적군에게 노출 없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17일 오전 부상자 125명 등 제3사단 병력 9천명과 경찰 1천200명, 지방공무원과 피난민 1천여 명이 승선을 마쳤다. 철수 병력을 실은 LST 4척은 미군 순양함 헤레나호와 구축함 4척의 호위를 받으며 항해해 이날 오전 10시 30분쯤 포항 구룡포에 도착했다.

◆포항 탈환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기계가 피탈되고 흥해 부근에 상당수 적이 출현했다는 보고에 영일비행장 방어대책을 강구했다. 영일비행장을 적에게 뺏길 경우 유엔군과 국군의 작전 전반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육군본부도 포항이 피탈되자 8월 15일 예비대로 확보하고 있던 민 부대(민기식 부대)를 영천에서 포항 방면으로 이동시켜 포항을 탈환하도록 했다. 민부대는 8월 17일 14명으로 편성된 전투정찰대를 피난민으로 가장해 주간에 침투 시켜 수색한 결과, 시내에는 적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포항 시내로 진입하던 북한군 제5사단 병력이 유엔 해군의 함포사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당하고 포항 외곽의 야산으로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이용해 8월 18일 포항 시내로 진입한 민부대는 포항을 탈환하고 추격 작전을 벌여 포항 북쪽의 진지들을 점령했다. 다음날인 19일 구룡포로 철수해 부대정비를 마친 제3사단이 민부대와 임무를 교대했다.

◆형산강 방어전
국군과 적은 포항을 놓고 인근 고지에서 뺏고 빼앗기는 혈투를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 3사단은 9월 4일 방어지역의 재조정을 단행했지만 수도사단이 인근 전선으로 이동함에 따라 방어 전선에 위협을 받았다. 수도사단장 이종찬 대령은 4일 오후 연락기를 타고 포항~안강~경주 일원의 대치상황과 지형을 정찰한 후 포항지구는 지형이 종격실로 방어에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방어에 유리한 형산강변에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해 적의 남진을 막기로 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6일 형산강을 건너 중단리 일대를, 7일에는 운제산 일대까지 내려왔다. 적 후속 부대들도 잇따라 형산강을 넘으면서 옥녀봉 일대는 북한군 손에 넘어갔다. 이에 따라 북한군이 경주로 침투하기가 쉬워졌다.
국군과 미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했다. 11일 데이비슨 특수임무부대가 전폭기의 지원을 받아 운제산에 있는 북한군을 공격, 국군이 옥녀봉 등 주변 지역의 퇴로를 차단하며 협공했다. 12일 북한군이 패해 물러났고, 14일에는 북한군이 형산강 북안으로 모두 물러났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한군의 배후가 차단됐다. 국군 3사단도 포항 탈환을 위해 형산강 도하작전을 추진했다. 16일 밤, 제3사단은 형산강을 건너기 위해 북한군 방어진지에 대한 공격에 나섰으나 완강한 저항에 부닥쳐 도하에 실패했다. 이에 22연대 제1대대 소속의 연제근 상사는 12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돌격을 감행해 북한군의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고 전사했다. 결사대의 활약에 힘입어 국군은 19일 형산강을 건너 진격해 다음날 포항을 탈환했다. 현재 포항시 남구 해도공원에는 형산강 도하작전의 영웅인 연제근 상사와 12인 특공대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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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목 대한민국 학도의용군회 포항시지회장

◆포항 전투 의의
한미 연합군은 8~9월 한 달여 동안 포항 인근에서 펼쳐진 처절한 전투에서 적군 1만5천343명을 사살하고 3천722명을 생포했다. 아군도 2천301명이 전사하고 4천40명이 실종됐다. 부상자 수도 5천908명에 달했다. 포항지역에서 벌어진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국군과 미군은 물론이고 군번도 없이 참전한 학도병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부산마저 위태로웠을 가능성이 크다. 한달동안 국군과 유엔군의 강력한 저항에 포항지역에서 묶인 북한군은 부산교두보 확보가 완전히 좌절됐으며, 전투력도 50~60% 격감하는 등 막대한 병력과 장비의 손실을 입었다. 포항 전장에 참전한 호국 영웅들의 희생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밑거름이 됐다.
당시 기계·안강 전투에 참전했던 김문목 대한민국 학도의용군회 포항시지회장은 “학도의용군은 정식 부대가 아니고 군번도 계급도 없이 현지부대에 입대했다. 당시 입대한 소년들은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겠다. 우리도 가자. 누구누구는 다 학도병으로 갔는데 안되겠다. 우리도 가자’라는 마음에 가게 된 것이 학도의용군”이라며 “1·2대대에 있던 많은 친구들이 안강·기계전투에서 희생을 많이 당했다. 호를 파던 경주 중학교 학생이 적의 총에 맞아 죽는 것을 앞에서 목격했다. 얼마나 분한지 말을 못한다. 그당시그걸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우리 학도병이나 학도의용군이 아니었더라면 이나라는 적화통일 되었을 것이다. 월남처럼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때 나는 자부심을 가지고 정말로 목에 힘주고 당당히 드러내고 후회라는 생각을 한번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된다. 전쟁이 나면 상대방 아니면 자신이 죽는 것이 전쟁이다. 그러면 지금 모든 국민들은 안보에 전념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항상 맑은 정신을 가지고 안보교육에 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포항=김기태기자 ktk@yeongnam.com

참고=6.25전쟁사 5 낙동강선 방어작전(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 주요 전투 2(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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