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친구의 술과 담배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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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2-06 08:02  |  수정 2020-02-06 08:08  |  발행일 2020-02-06 제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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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원〈다님그룹 대표〉

밤 비행기를 타러 택시에 올라탔다. 방콕에 왔다가 수완나품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은 지난 15년 동안 거의 매년 수십 번째 반복하고 있다. 오토바이, 버스, 택시 등을 가리지 않고 타 봤지만, 무엇을 타도 타기만 하면 창문에 기대어 창 밖으로 눈을 멍하게 두고 보는 건 이제 자동이다. 천천히 사람들이 지나간다. 가로수, 불빛들도 지나간다. 점점 보이는 것은 큰 건물과 큰 간판들만 남는다. 그마저도 빠르게 멀어져만 간다.

며칠 전 태국 친구를 만났다. 철 없던 20대에 만나 홍대에서, 그리고 방콕에서 밤낮 없이 에너지를 함께 불태웠던 죽마고우다. 우리는 이제 얼굴 보고 나면 가족의 안부부터 묻는 나이가 되었다. 친구의 모친께서도 얼마 전 나의 안부를 물으셨다는데, 그분이 기억하는 철 없던 내 모습을 생각하면 얼굴이 뜨끔해진다.

"촉 디" 차이니즈 뉴이어를 맞아 행복을 기원하는 잔을 건넨다. 친구는 "건배"라고 받아친다. 잔을 내리자마자 친구는 얼마 전 사망한 미국의 농구스타 코비 브라이언트 이야기를 꺼낸다. 장난기 넘치는 친구의 표정이 사뭇 가라앉았다. 곧장 담배를 꺼내 물더니 빨리 감기 비디오를 돌리듯 뽁뽁뽁뽁 빨아댄다. 쌩쌩하던 담뱃불이 20초 만에 사라진다.

사실 친구는 건강 때문에 지난 몇 년간 술도 담배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때 만난 이 친구 얼굴을 생각하면 인도의 유명한 스님이나 구루가 따로 없었다. 그랬던 그가 다시 예전 모습 그대로 담배를 피워대는 모습이 반갑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나는 또 예전처럼 잔을 거든다. "촌 깨우" 한 잔 박자. 친구는 웃으면서 박고는 잔을 내리면서 또 표정을 가라앉힌다.

"My brother passed away." 어릴 적부터 친형처럼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며칠 전 뇌출혈로 죽었고, 장례를 직접 치르고 왔다고 한다. 그리고 대화는 "우리가 오늘을 살고는 있지만 누가 언제 죽을지는 모른다는 말은 정말 사실인 것 같아. 남의 얘기가 아니야.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보고, 이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다니. 우리는 이것조차 상상을 못 했잖아. 시간은 정말 연기처럼 빨리 지나가"로 이어졌다.

저 멀리 공항을 밝히는 푸른 불빛이 보인다. 건강 걱정으로 모든 욕망을 절제하고 정지된 표정으로 몇 년을 꼬박 살아내던 그 친구가 갑자기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술잔을 드는 그 마음을 나도 이제 알듯도 하다.
이호원〈다님그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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