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한국문학] 기억과 기록: 자기를 이야기하다

  • 이은경
  • |
  • 입력 2020-02-13   |  발행일 2020-02-13 제30면   |  수정 2020-02-13
기억은 과거에 머물지 않아
기록되는 과정서 정체성 얻고
쓰는 사람 추동하는 힘 가져
최근 들어 생애사 쓰기 유행
자서전 쓰며 자기 격려해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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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연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최근에 '기억과 기록 사이'라는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 북디자이너인 이 책의 작가는 자신이 읽고 만들어온 책들을 가지고 삶의 내력을 이야기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은 자신의 삶 속에 들어왔던 책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 순간들을 기록한 것이다. 작가의 첫 책은 마테를링크의 희곡 '파랑새'를 원작으로 하는 유아용 그림책이다. 작가는 이 책을 읽었던 순간의 기억을 선명하게 떠올리지 못한다. 대신 세 살배기인 자신에게 그 책을 읽어주던 어머니의 기억을 옮겨 적으며 자신의 유아기를 기록한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젊은 아기엄마였던 작가의 어머니는 혼자 생계를 꾸리면서도 귀가 후엔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었고, 여러 번 읽어서 글을 읽는 것처럼 외어 읽던 아이를 보며 삶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처럼 작가는 자신의 유년기를 지탱해온 어머니의 기억을 토대로 자신의 생애를 거슬러 기록할 수 있었고, '파랑새' 이후 자신의 삶에 영향을 준 책들을 매개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책 읽기를 독려했던 작가의 어머니가 딱 한 번 그의 독서에 대해 면박을 준 적이 있는데, 그 책이 바로 최인훈의 '광장'이다. 월북한 아버지를 둔 주인공의 이야기라서 어머니가 마뜩잖게 생각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작가는 어머니에게 저항하듯이 도서관에서 최인훈의 소설들을 빌려와 읽었다고 한다. 그는 2018년에 작고한 최인훈에 관한 기사를 읽으면서 '광장'이 100만 부 이상 팔렸음을 알게 되며, "누군가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렸다고 해도 출간된 책은 어딘가에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책을 통해 자기 삶을 이야기하는 글쓰기 방식은 최인훈 소설과 매우 유사하다. 특히 자전적 소설 '화두'는 국어시간의 독후감 과제를 통해 소설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던 '낙동강'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되며, 그의 삶을 거쳤던 무수한 책과 역사적 사건들을 경유한다. 소설의 마지막 문턱에서 화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 자신이 주인일 수 있을 때 써둬야지. 아니, 주인이 되기 위해 써야 한다. 기억의 밀림 속에 옳은 맥락을 찾아내어 그 맥락이 기억들 사이에 옳은 연대를 만들어내게 함으로써만 나는 나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겠다. 그 '맥락', 그것이 '나'다. 주인이 된 나다."

기억을 통해 개인의 과거는 보존되지만, 기억은 과거에 종속되어 있지 않고 그것을 풀어쓰고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 정체성을 획득한다. '화두'와 '기억과 기록 사이'는 책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세워가는 한편, 유년기에서 현재에 이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엉클어진 기억을 재구성하여 자신의 삶을 기록했다. 이처럼, 자기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기억을 통해 개인적(혹은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하고, 그것을 현재의 사건으로 지속되게 한다. 이러한 점에서 자신의 기억을 기록하는 일이야말로 현재의 나를 추동하는 힘을 갖는다.

몇 해 전부터 자서전 쓰기나 구술을 통한 생애사 쓰기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필자도 대학 안팎에서 자전소설과 자서전 등 글쓰기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이러한 수업을 통해 깨달은 것은, 장르와 형태를 불문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할 때 놀라운 일이 생긴다는 사실이다. 글을 쓰는 이들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과거의 기억들을 통해 자기를 다시 바라보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을 격려한다. 이들의 달라진 눈빛과 표정에서 '자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지닌 신비한 힘을 느낄 수 있다. 독자 여러분도 그러한 경험을 꼭 해보길 바란다.배지연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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