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 이은경
  • |
  • 입력 2020-02-20   |  발행일 2020-02-20 제23면   |  수정 2020-02-20

2020021901000778500031841

오늘(15일)은 '미세먼지 좋음'인 날이다. 환기를 하려고 베란다 창문을 열었는데 스며들어 오는 공기가 무척 따뜻하다. 이번 겨울은 그렇게 추운 날도 없었지만 이렇게 따뜻한 날은 또 있었나 싶다. 그러고 보니 지난해 12월에도 오늘처럼 따뜻한 날이 있었다.

출장을 마치고 오랜만에 '사이섬'으로 출근했었다. 사이섬은 대구 북구 구암동에 있는 작은 커피바다. 그날도 청소를 하려고 앞뒤로 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했다. 공기가 따뜻해서 외투를 벗고 돌아서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화병에서 꽃잎이 한점 떨어져 있었다. 가장자리가 말라비틀어진 그 꽃잎을 보며 잠시 멈춰 서 있었다.

조명을 켜고, 낡은 앰프의 전원도 켰다. Eva Cassidy의 'Song bird' 앨범을 골랐다. CD를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홀 바닥을 쓸고, 닦고, 테이블과 의자도 닦았지만 꽃잎이 떨어진 테이블은 그대로 두었다. 청소를 마치고, 에스프레소를 내렸다. '칙칙칙' 스팀으로 우유를 데워 따뜻한 라테를 만들었다. 잔을 들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날이 참 좋다. 햇볕도 이렇게 따뜻하고, 사이섬 안에서 들려오는 Eva의 목소리도. 그 순간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장했다고, 수육 삶았으니 올라와서 같이 먹자고 했다.

내가 14세 때부터 매일 오르던 그 집, 여느 때처럼 계단을 따라 3층까지 오르는 길이 마치 타임머신 같았다. 얼마 전 골반을 다친 어머니는 한 손을 엉덩이에 올리고 짝다리를 짚고 서 있었고, 아버지는 분홍색 고무장갑을 끼고 빨간 고무대야 앞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여든을 바라보는 노부부가 겨울 김장을 하고는 쉰이 된 큰딸과 마흔이 가까운 막내아들을 불렀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아들 우리 딸 같이 무그니까 존내애. 너거 마싯는거 줄라꼬 저짜 농협에 가가 돼지고기 젤 마싯는 걸로 달라캣다 아이가. 마이 무래이." 나는 촌스럽게 아무런 말도 못하고, 머쓱하게 먹기만 하고는 내려왔다.

다시 가게로 들어오는데 바 위에 놓인 시집이 보였다. 떨어진 꽃잎 같이 빛바랜 표지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부모님과 함께 있을 때도 떨어진 꽃을 보듯 시간을 기어이 흘려보낸 내가 참 어리석었다. 떨어질 꽃잎처럼, 언젠가 다할 우리 모두의 인생처럼, 우리가 사랑할 시간은 정말로 그다지도 많지가 않은데 말이다.

이호원〈다님그룹 대표〉

문화인기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