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性 다양성이 존중받는 일상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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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5-20 07:28  |  수정 2020-05-20 07:35  |  발행일 2020-05-20 제24면

안민열
안민열<연극저항집단 백치들 상임연출>

독일에 머문 지 석 달 즈음인가. 언어 연수도 해야 하고 한국어는 점점 잊혀 가고 있던 중이라, 현지 친구를 사귀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 찾기 시작했다. 그때 베를린 자유대학교 한국어학과에서 언어교환 모임인 이른바, 탄뎀(Tandem)을 주선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늦은 저녁 캠퍼스를 찾았다.

몇 사람을 만나고 난 뒤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해 집으로 돌아가던 찰나 한 독일인 여성이 함께 맥주를 마시러 가지 않겠냐고 권했다. 그렇게 우리의 우정은 시작되었다.

몇 번의 모임을 가진 뒤 독일 친구는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나와 한국인 친구, 이렇게 세 명이서 초밥과 맥주 몇 병을 사서 나눠 먹으며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불쑥 독일인 친구가 자신이 바이섹슈얼리스트(Bisexuell)라 말했다.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양성애자라는 의미인데, 나와 한국인 친구는 잠시 당황했지만 표정을 숨기고 그 친구의 말을 주목했다.

얼마 전, 멀리 있는 할머니 집에서 가족이 식사를 했는데 갑자기 할머니께서 "우리 가족에는 LGBT(성적소수자)가 없어서 다행이야"라고 하셨단다. 그 친구는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할머니의 말씀에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언제면 자신의 정체성을 밝힐 수 있을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독일은 유럽 국가 가운데 성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지표를 보면 항상 선두권에 머물러 있다. 대표적인 예로 독일 헌법재판소는 2019년 1월1일자로 제3의 성으로 정의되는 간성(Intersex)을 인정했다. 의사의 진단만 받으면 자신의 법적 기록물 모두에 남성도 여성도 아닌 다양성(Diverse)으로 기재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 판결이 날 때까지 많은 담론이 생산되었지만, 이 판례로 인해 독일에 사는 다양한 성 정체성을 지닌 이들은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으며 살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던 독일인 친구는 걱정은 있지만 심각하진 않았다. 아버지 세대의 우려와 반대가 결코 자신의 정체성까지 바꿀 순 없기 때문이다. 매년 세계 각국에서 성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움직임은 여전히 활발하다. 흘러가는 시대의 흐름은 두려움의 그늘 속에서 서서히 얼굴을 내미는 이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다.

모임을 갖고 난 뒤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보내며 웃으며 서로에게 화답했다. 자정이 갓 지난 밤하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하고 맑았다.
안민열<연극저항집단 백치들 상임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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