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나는 이런 예술을 바란다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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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6-10  |  수정 2020-06-10 08:19  |  발행일 2020-06-10 제18면

안민열
안민열 〈연극저항집단 백치들>

시간이 흐르면서 연극연출가로서 내 성향은 점차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노동문제나 인권, 인종 소수자들에 눈길이 갔고, 신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회적 억압을 받는 이들을 소재로 한 연극을 제작했다. 초창기 공연 당시에는 큰 이슈나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이 시기부터 우리의 작업물은 조금씩 인정을 받거나 점차 유랑하며 공연할 수 있게 되었다.

내 공연이력 중에서 기억에 남는 연극은 '니 애비의 볼레로'라는 작품이다. 한국 연극의 거장이자 극작가인 윤대성 선생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윤대성 희곡상' 수상작인데, 윤대성 선생님은 일반 대중에게는 드라마 '수사반장'의 작가로 많이 알려진 분이다. 이 희곡상은 매년 한국 연극을 이끌어갈 전도유망한 젊은 극단을 엄격히 심사해 선정하는 독특한 제작방식을 갖고 있는데, 서울을 제외한 지역 공연단체가 최초로 공연할 기회를 얻게 된 터라 우리는 흥분에 젖었다.

작품의 내용은 단순하다. 한국과 필리핀의 혼혈아, 이른바 '코피노'라 불리는 한 인간이 한국에 아버지를 찾으러 오는 여정을 담은 이야기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그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점이다. 필리핀에서는 한국인이라 불리고, 한국에서는 외국인이라 불린다. 일할 곳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그는 입에 담지 못할 모욕과 비난을 버텨낸 후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은 내 주위에 있는 나를 사랑해주는 이들과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에 있다는 진실에 도달하게 된다.

이 연극이 지향했던 이상향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한 인간의 내재된 억압과 굴종을 다루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고 어두운 어딘가에서 울고 있는 인간을 향한 이타적인 시선과 사랑만이 이 사회를 따듯하게 만드는 비결임을 말한다.

내 주위에 다양하게 실재하는 이들과 관계를 맺으며 사는 삶은 결국 우리의 시선에 의해 정의되고 재해석된다. 내가 한국이라는 국가에서 한 예술가로 살아가고자 함은 거창한 이상을 주장하거나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옆에 존재하는 소외된 인간과 부조리한 사회적 문제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말을 대변하고 지지하며 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적어도 나의 예술은 우리의 아름다움만 설파하는 것보다 작고 연약한 어떠한 것들을 끌어안고 한 걸음 딛기 위해 존재하길 원한다. 우리의 삶은 한정돼 있지만, 기억과 시간은 무한하기에 우리의 행위는 현재진행형이다.

안민열 〈연극저항집단 백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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