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에서 꽃피운 역사인물 .4] 韓日 가교의 상징 항왜 장수 모하당 김충선

  •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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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7-02   |  발행일 2020-07-02 제13면   |  수정 2020-12-01
"명분없는 전쟁 반대" 임진왜란 1주일만에 투항한 반전·평화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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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자리잡은 녹동서원. 1789년 지역 유림에서 유교적 문물과 예의를 중시했던 모하당 김충선의 뜻을 기려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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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양국의 우호와 문화관광 교류를 위해 건립된 달성한일우호관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일교류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는 한·일 양국 관계에 남다른 의미를 갖는 공간이 있다. 한쪽 앞발로 사람을 부르는 듯한 고양이상이 방문객을 맞이하는 달성한일우호관이다. 2012년 개관한 우호관은 최근 들어 매년 3만명 이상의 관람객이 꾸준히 방문할 정도로 달성의 명소가 됐다. 달성과 일본이 어떤 연결고리가 있기에 이곳에 우호관이 지어졌을까. 설립 배경에는 항왜(降倭) 장수 김충선(金忠善)이 있다. 일본 출신인 그는 임진왜란(임진전쟁)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대의와 명분 없는' 전쟁이라며 조선에 투항했다. 이후 조총(鳥銃)과 화약 제조법을 조선에 전수하고, 수많은 성을 탈환하는데 힘을 보탰다. 또 이괄(李适)의 난, 병자호란(병자전쟁)에서 공을 세워 삼란공신(三亂功臣)에 올랐다. 일본에서도 그의 삶이 재조명되면서 반전·평화주의자이자 한·일 가교의 상징으로 평가 받고 있다. '달성에서 꽃피운 역사 인물 4편'에서는 모하당(慕夏堂) 김충선의 삶에 대해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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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동서원 뒤편 산 중턱에 위치한 김충선 묘소.

◆사야가(김충선), 그는 누구인가

사야가(沙也可), 그는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일본인으로 조선에 귀화한 사실은 명확하나, 출신이나 가문 등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 그가 쓴 시와 글을 모은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에도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일본에서의 삶이 베일에 싸여 있는 셈이다. 전쟁 중 조선에 귀화한 터라 본국에 남은 친인척 등을 위해 의도한 바가 아닐까. 때문에 사야가라는 이름 역시 가명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의 출신과 관련해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가장 신빙성 있는 주장 가운데 하나는 그가 '사이카슈' 출신이라는 견해다. '바다의 가야금'의 저자 고사카 지로는 김충선이 철포(鐵砲) 집단으로 이름을 떨친 사이카슈의 일원으로 기슈(紀州·현 와카야마현) 사이가(雜賀) 지방 출신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사야가(サヤガ)란 이름도 사이카(サイカ) 또는 사이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사이카슈는 전국시대 최강의 철포부대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다 결국 멸망했다.


출신·가문 등 일본에서의 삶 베일
일부선 기슈 사이가 지방 출생 추정
왜장 가토 기요마사 선봉장으로 참전
"군자의 나라 짓밟을 수 없다" 귀화
1600년 가창 우록리 터잡고 뿌리내려
임란·이괄의 난·병자호란 '삼란공신'



일본 향토사학자 야마나카 야스키는 사이카슈의 무장인 쓰치하시 헤이죠의 둘째아들 헤이지가 사야가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외에도 많은 이가 사이카슈가 멸망하고 생존한 인물 중 한 명이 조선으로 건너가 김충선이 됐을 것으로 짐작한다.

김충선의 일본 성(沙)을 토대로 사씨 가문설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이는 시가현(佐賀縣) 가라츠시(唐津市) 명각사의 주지가 성을 '사이고(沙)'로 사용하고, 그의 선조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철포부대 대장으로 전쟁에 나갔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

또 당시 출전했던 일본 장수의 일기에 두 명의 항왜 장수가 등장하는데 김충선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울산성·순천성 전투 기록에 나오는 항왜장 '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와 '아소노미야 에치고노카미'가 김충선이라는 주장이다. '풍신수길의 조선침략'을 쓴 기타지마 만지는 오카모토가 휘하병을 이끌고 조선에 투항한 뒤 항왜를 통솔하는 무장의 지위에 있었던 점, 오카모토와 아소노미야가 모두 에치고노카미라는 호칭을 사용한 점으로 미뤄 세 인물이 동일인이라고 유추한다.

김충선은 자손에게도 출신에 대한 배경을 밝히지 않았기에 이들의 주장은 단지 추정에 불과하다. 다만 김충선이 조선에 총포기술을 전파했다는 역사적 기록과 도요토미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는 점으로 볼 때 사이카슈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중론이다. 반면 김충선이 실존 인물이라는 사실은 역사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각각 항왜첨지사야가(降倭僉知沙也加), 항왜영장김충선(降倭領將金忠善)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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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선의 위패가 모셔진 녹동사 앞에는 모하당김공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일본군 선봉장에서 조선의 삼란공신으로

모하당문집 등에 따르면 김충선은 1571년(선조 4) 일본에서 출생했다. 일본 이름은 사야가, 자는 선지(善之), 호는 모하당이다.

그가 조선 땅에 발을 내디딘 것은 임진년(1592년) 4월13일의 일이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선봉장(先鋒將)으로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부산 동래에 상륙했다. 평소 흠모하던 조선을 침략하는 전쟁의 선봉에 선 셈이다.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던 그는 일주일 만에 투항한다.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晋)에게 서신을 보내 귀화의 뜻을 밝힌 것이다. 앞서 그는 조선인을 해치거나 노략질을 하지 않겠다는 '효유서'를 써 민심이 동요하지 않도록 한 터였다.

당시 투항한 일본인을 '항왜(降倭)'라 칭했다. 조선의 입장에서 항왜는 여러모로 유용한 존재였다. 적의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고, 무기 관련 기술도 전수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통상 항왜는 전황이 좋지 못해 투항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야가는 달랐다. 그는 조선을 동경해 처음부터 귀화를 결심했다고 술회한다.

실제 그가 박진에게 보낸 강화서에는 "내가 못난 것도 아니요, 나의 군대가 약한 것도 아니나 조선의 문물이 일본에 앞서고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나라를 짓밟을 수 없어 귀순하고 싶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귀화한 그는 경상도절도사 휘하에서 활동하며 조총과 화약 제조기술을 전수하고, 동래(東萊)·양산(梁山) 등지에서 공을 세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른다.

이듬해에는 도원수 권율(權慄)과 어사 한준겸(韓浚謙)의 청으로 성씨와 이름까지 하사받는다. 이때 선조는 그를 불러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며 사성(賜姓)김해김씨(金海金氏)에 충선(忠善)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벼슬을 제수했다고 한다. 이로써 김충선은 사성 김해김씨의 시조가 됐다.

사야가에서 김충선이 된 그는 1600년(선조 33) 달성 우록리에 터를 잡고 인동장씨와 백년가약을 맺는다. 자신의 호를 딴 모하당을 세우고, 가훈(家訓)과 향약(鄕約)도 마련했다. 자신의 후손이 대대손손 조선에 뿌리내리기를 바랐던 것이다.

1603년에는 북쪽 변경에 오랑캐가 자주 침입해 온다는 말을 듣고 변방의 방어를 자청했다. 이로부터 무려 10년간 요해지(要害地)를 수호했다. 그 공을 인정받은 그는 정헌대부(正憲大夫)의 자리까지 오른다.

변방 수호를 끝내자마자 이괄(李适)의 난(1624년·인조 2)이 일어났고, 그는 또 부하를 이끌고 진압에 참여했다. 이때 김충선은 김해에서 이괄의 부장(副將)인 서아지(徐牙之)를 참수하는데, 서아지 역시 항왜장(降倭將) 출신이었다. 난을 진압하고 김충선은 사패지(賜牌地)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수어청(守禦廳)의 둔전(屯田)으로 쓰게 했다. 그가 사사로운 이익을 탐하지 않는 청백리의 모습도 갖췄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활약은 나이를 무색게 했다. 1627년 정묘호란(정묘전쟁), 1636년 병자호란(병자전쟁)이 터지자 또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특히 병자호란 때는 광주(廣州) 쌍령(雙嶺)에서 청나라 군사를 물리치는 데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임진왜란부터 이괄의 난, 병자호란까지 맹활약한 그는 7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명분 없는 침략을 단호히 거부한 김충선은 전란의 위기에 조선을 구한 충신이자 평화의 메신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 그의 박애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져 한·일 우호 관계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문헌 : 대구의 뿌리 달성, 제5권 달성에 살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김충선 일본군 선봉장에서 조선의 장군으로 변신하다, 신병주. 항왜 김충선(사야가)의 모하사상 연구, 김선기.
▨자문= 송은석 대구문화관광 해설사
공동기획 : 달성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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