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에서 꽃피운 역사인물 .5] 문헌공 노당 추적(1246~1317)

  •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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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7-16   |  발행일 2020-07-16 제13면   |  수정 2020-12-01
명심보감 편저·유학교육…고려 성리학 보급의 선구자
할아버지때 송나라서 건너와 정착
15세에 급제 예문관대제학 등 역임
1853년 실전 552년 만에 묘소 찾아
1866년 인흥서원 세우고 위패 모셔
서원 장판각엔 명심보감 목판 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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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위치한 인흥서원은 추계추씨 3세조이자 고려 말기 문신인 노당 추적을 기리기 위해 창건됐다.


대구 달성에는 성리학의 역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있다. 노당(露堂) 추적(秋適)의 위패를 모신 인흥서원(仁興書院)이다. 추적은 회헌(晦軒) 안향(安珦)과 함께 성리학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게 한 인물이다. 실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남긴 '무릉잡고(武陵雜稿)'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해동(海東)에서 유교를 숭상하고 학교를 건립한 도가 복초당 안선생 문성공 유와 노당 추선생 문헌공 적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누구라도 흠모하지 않겠는가.' 문성공 유와 문헌공 적이 바로 안향과 추적이다. 그만큼 추적이 성리학에 있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또한 그는 '명심보감(明心寶鑑)'의 편저자이기도 하다. 중국 고전에 나온 선현들의 금언(金言)·명구(名句)를 편집해 만든 명심보감은 시대를 거슬러 현재에도 교양도서로 자리 잡고 있다. '달성에서 꽃 피운 역사 인물 5편'에서는 문헌공 노당 추적에 대해 다룬다.


◆송나라에 뿌리를 둔 추계추씨

추적의 가문은 중국 송나라에서 건너왔다. 할아버지인 추엽(秋)이 고려 인종(1122~1146년) 때 가솔을 이끌고 와 추계추씨(秋溪秋氏)의 시조가 됐다. 문중 자료 등에 따르면 추엽은 동해상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비치는 것을 보고 큰 뗏목을 타고 고려에 왔다고 한다. 송나라가 금나라의 위세에 밀려 쇠멸해가는 것을 보고 새로운 터전을 찾아간 곳이 고려였던 것이다. 추엽은 1141년 송나라 문과에 급제해 높은 관직에까지 나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인 추황(秋篁)도 문신으로 명성이 높았다. 고려사에는 추황이 아닌 추영수(秋永壽), 문정공 조충공의 지석에는 추영수(秋潁秀)로 기록돼 있다.

추황은 비교적 어린 나이인 16세 때 문과에 급제했다. 학식만 갖춘 것이 아니라 인품도 겸비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됨됨이를 엿볼 수 있는 단편적인 일화가 있다. 보성의 원으로 부임해 임기를 마친 뒤 그는 그동안 모아두었던 녹봉을 백성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몽골의 침략으로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항전할 당시 임금을 극진히 보좌한 공을 인정받아 예문관 대제학 등 고관에 올랐다. 그는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훗날 그를 기리는 제자들에 의해 이학종사(理學宗師)라는 명성을 얻었을 정도다. 사후에는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도 내려졌다.

◆지학(志學)의 나이에 급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혈통을 이어받아서일까. 추적은 떡잎부터 남달랐다. 1246년 태어난 그는 15세가 되던 1260년(원종1) 문과에 급제했다. 아버지보다 한 살 더 어린 나이에 합격한 것이다. 당시 회헌 안향도 18세의 나이로 급제했다. 성리학 보급의 주역인 안향과 추적의 인연이 과거를 통해 시작된 셈이다.

지학의 나이에 급제한 추적은 안동부서기를 시작으로 사록, 직사관, 좌사간, 용만부사, 원주목사 등을 역임했다. 당시 추적의 성품은 고서 등에 기록된 일화로 알 수 있다.

먼저 좌사간 때 일이다. 1298년(충렬왕 24) 환관 황석량(黃石良)이 권세를 이용해 자신의 고향 합덕부곡(合德部曲·현재 충남 당진군 합덕읍)을 현(縣)으로 승격시키려 하자 추적은 문안에 서명을 거부했다. 부당한 일에 동조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를 빌미 삼아 황석량은 왕에게 참소(讒訴)했고, 추적은 칼이 씌워져 순마소(巡馬所·원나라가 내정간섭을 위해 고려에 둔 감찰기관)로 보내졌다. 이때 압송하던 이들이 '이목이 있으니 골목길로 가자'고 하자 추적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는 "마땅히 넓은 길을 감으로써 모든 이들이 나를 보게 할 것이다. 또 간관(諫官)으로서 칼을 씌움은 영광스러운 일이니, 어찌 아녀자들처럼 길거리에서 낯을 가리는 것을 본받겠느냐"고 꾸짖었다.

평안북도 용만부사로 부임할 때의 일화도 전해온다. 용만은 오지이긴 하나 압록강을 경계로 원나라와 마주한 접경지대로 교통·군사·무역의 요충지였다. 신임 부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관리들은 성대한 잔칫상을 마련했다. 하지만 관청에 도착한 추적은 아무 말 없이 상을 물리쳤다. 관리들은 상차림이 초라한 탓이라 여겨 부사에게 상을 다시 차리기를 청했다. 이에 추적은 "산해진미는 필요 없다. 오직 밥 한 그릇과 나물국이면 족하다. 백금을 써 팔진미를 차려놓아도 입으로 한 번 지나가면 다 마찬가지인 것"이라며 타일렀다고 한다.

◆성리학의 보급과 발전에 이바지

충렬왕 말년 추적은 안향에 의해 발탁돼 시랑(侍郞) 겸 국학교수(國學敎授)로 고위 관직자의 자제와 생원들에 대한 유학교육을 담당했다.

당시 안향은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를 오가며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주자학의 국내 보급을 위해 힘썼다. 대표적인 사례가 국학(성균관)과 사학을 세운 것이다. 또 고려말 장학제도를 대표하는 '섬학전(贍學錢)' 사업을 제의해 시행했다. 섬학전은 국학생들의 학비를 보조하기 위해 관리들이 품위에 따라 낸 장학기금이다. 일부 자금은 원나라에서 유학과 관련된 여러 서적과 제기·악기 등을 구하는 데도 사용됐다고 한다.

안향은 추적의 능력을 높이 사 성리학 보급에 그를 중용했다. 후진을 양성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닌 국학교수를 맡긴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고려말 안향과 추적 등이 성리학 중흥책을 펼치며 고려 국학은 전성기를 누렸다. 고려사에는 '마치 중국 연경의 시장터처럼 학생들로 붐볐는데, 그 수가 수백에 이르렀다'고 당시 국학을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추적은 안향과 함께 고려의 학풍을 성리학 중심으로 재편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추적은 민부상서, 예문관 대제학까지 지낸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후 충선왕에 의해 다시 정2품 평장사(平章事)에 제수되고, 밀성백에 봉해졌다. 추적이 명심보감을 편저한 시기는 국학교수 또는 밀성백을 역임한 시기로 추정된다. 하지만 학계를 중심으로 중국 명나라의 '범립본'이 편저자라는 주장이 제기돼 원저자에 대한 논란이 진행 중에 있다.

50여 년간 고려의 번영과 성리학 발전에 헌신한 추적은 1317년(충숙왕 4) 향년 7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사후에는 문헌(文憲)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며, 평안도 용천부에 섬학재이란 재실이 세워지고 영정이 하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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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흥서원 장판각에는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된 인흥서원본 명심보감 목판이 보관돼 있다. 이는 국내 유일한 명심보감 목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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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흥서원 뒷산에 있는 추적의 묘소는 552여 년이 지난 뒤에야 후손 추세문과 추성옥에 의해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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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흥서원 입구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는 노당 추적 선생 신도비. 예조판서를 역임한 신석우가 비문을 지었다.


◆552년 만에 찾은 묘소 그리고 인흥서원

추적의 위패를 모신 인흥서원은 1866년(고종 3)에 세워졌다. 안향을 기리는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이 1543년 건립된 것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크다. 인흥서원이 긴 세월을 건너 뒤늦게 세워진 데에는 어떤 연유가 있을까.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후손들이 중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손자인 추유(秋濡)는 중국으로 넘어가 명나라 개국공신이 된다. 공신에 이름을 올린 만큼 벼슬도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이르렀다고 한다. 중국으로 돌아간 추적의 후손이 다시 이 땅에 발을 디딘 건 조선시대다. 그것도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임진왜란 당시다.

추적의 7세손인 추수경(秋水鏡)은 1591년(선조 24) 명나라의 무강자사(武康刺史)가 된 이후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원군으로 조선에 파병된다. 그의 다섯 아들인 노·적·국·지·란도 함께 출병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추수경은 명나라로 돌아가지 못한다. 정유재란 때 부상을 입고 병세가 악화돼 1600년(선조 33) 전주에서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선조는 왕명으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그를 보국숭록대부 완산부원군에 추증했다. 아버지를 조선 땅에 묻은 다섯 아들은 모두 나주에 정착해 뿌리를 내렸다. 추계추씨 가문의 역사가 다시 시작된 셈이다.

이로부터 2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후손인 명암(明庵) 추세문(秋世文)과 추성옥이 등장한다. 추계추씨 가승에 따르면 추성옥은 대구읍지를 통해 추적의 묘가 '인흥'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대구 출신인 추세문과 선조의 흔적을 찾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이들은 1853년 달성군 화원읍 인흥리에서 추적의 묘소를 찾아냈다. 실전된 지 552년 만이다. 이후 유림들은 후손들과 힘을 모아 묘 아래 사당을 건립하고, 추적의 위패를 모셨다. 이후 1866년 인흥서원이 세워지고 추황과 추유, 추수경도 함께 배향됐다.

현재 인흥서원 장판각에는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7호 '인흥서원본 명심보감 목판'이 보관돼 있다. 국내 여러 판본의 명심보감이 통용되고 있으나 현존하는 목판은 인흥서원본이 유일하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문헌= 대구의 뿌리 달성, 제5권 달성에 살다. 달성의 유교 문화재, 김봉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자문= 송은석 대구문화관광 해설사
공동기획 : 달성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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