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우리집 터줏대감

  • 박진관
  • |
  • 입력 2020-08-03 08:09  |  수정 2020-08-03 08:25  |  발행일 2020-08-03 제21면

2020080201000023800000581
나제현〈훌라 프로모터〉

우리 집 전자레인지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20년 동안 쉼 없이 일해 온 가전으로, 냉장고 다음으로 집에서 가장 오래된 터줏대감이다. 최근에 들어온 에어프라이어 때문에 입지가 조금 흔들렸지만 여전히 '열일'하며 훌륭히 소임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전자레인지가 너무 잘 작동하는 게 문제가 됐다.

문제의 발단은 5년 전쯤 시작됐다. 무엇이 어긋난 건지 시작 버튼이 가끔 단번에 작동이 안 되더니 이내 덜그럭 소리를 내며 버튼이 뚝 떨어져 버린 것이다. 아쉬운 대로 젓가락·이쑤시개 등으로 쑤셔서 몇 달을 사용하다가 매번 막대기를 찾는 게 귀찮아 버튼을 만들었다. 두꺼운 종이를 버튼 모양으로 오려 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면봉을 꽂아 테이프로 고정했다. 땜빵은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 버튼의 콤비인 취소 버튼도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빨간 전자레인지에 하얀 종이 땜빵이 외관상 허접하기 그지없지만 두 버튼 모두 지금까지 테이프조차 바꾼 적 없이 기똥차게 잘 쓰이고 있다.

그런데 석 달 전쯤 이번엔 손잡이가 흔들리더니 빠졌다. 손잡이와 문이 일체형이었는데, 불행 중 다행인 점은 플라스틱 외장이 빠진 것이고, 문이 검은 속살을 드러냈을 뿐 전자레인지 작동에 전혀 이상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래 썼으니만큼 새로 사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기능에 문제가 없다는 걸 강조하며 그냥 쓰자고 했지만, 몇천 만원짜리 차도 20년을 안 타는데 10만원도 안 하는 걸 20년 동안 썼으면 바꿔도 된다는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물건을 오래 쓰는 게 더 힘들어졌다. 튼튼한 제품이 나오면 "(기업명) 000의 실수"라는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니 말이다. 기술의 발전과 유행이 멀쩡한 것도 버릴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되어주기에 고치지 않기도 하지만, "고치느니 새로 사는 게 더 싸다"라는 말과 "(기술이 발전했음에도) 골드스타 같은 옛날 물건이 오히려 고장 나지 않는다"라는 사실은 나의 '현대문명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다.

이 불가사의가 나만의 생각이 아닌지, "새로 사봤자 요즘 물건은 금방 고장난다"고 우겼더니 가족 모두 수긍해 주었다. 덕분에 계속 쓰게 된 너덜너덜한 전자레인지를 보며,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유일한 것이 시간의 흐름이라는데, 소비에서만큼은 돈의 흐름만이 유일하게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제현〈훌라 프로모터〉

기자 이미지

박진관 기자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문화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