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에서 꽃피운 역사인물 .7] 하빈면 동곡 출신 유학자 임하 정사철·낙애 정광천

  •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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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8-13   |  발행일 2020-08-13 제13면   |  수정 2020-12-01
아버지는 대구 儒學의 선구자…아들은 임란 의병 일으켜 큰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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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철과 정광천을 배향하는 금암서원은 1871년(고종 8) 훼철됐다가 1958년 후손들에 의해 금암서당으로 복원됐다. 현존하는 건물은 서당 한 채가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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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암서당 인근에는 정사철과 정광천 부자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퇴계학에 뿌리를 둔 대구의 유학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한 명이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이다. 달성에서 나고 자란 그는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과 함께 많은 후학을 양성하며 대구 유학 1세대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는 강학에 몰두해 대구지역 문풍을 후대에 전수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그는 지역 유림 최고 지도자로 의병활동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노년의 나이로 직접 활약하진 못했으나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의병 활동의 선봉에 섰다. 그의 아들인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 역시 의병을 일으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달성에서 꽃 피운 역사 인물 7편'에서는 임하 정사철과 낙애 정광천의 삶에 대해 다룬다.

후학 양성 힘쓴 정사철
임하초당·선사서사 짓고 강학 매진
평생 성리학 배우고 가르침 후대 전해
임란 의병장 추대됐지만 병으로 고사
사후 170여년 지나 금암서원에 배향

임진왜란 의병 일으킨 정광천
한강 정구·계동 전경창 가르침 받아
곽재우 장군 화왕산성 전투 도와 전공


◆소학과 서경, 주역을 탐독

정사철은 1530년(중종 25) 4월24일 달성 하빈면 동곡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계명(季明), 호는 임하다. 그는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두각을 나타냈는데, 문장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7세 때 효경(孝經)을 처음 접하고, 이듬해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었다. 10세부터는 소학(小學) 공부를 시작해 서경(書經)과 주역(周易)도 탐독했다. 16세의 나이로 성주 이씨와 백년가약을 맺은 그는 어머니의 곁을 떠나 분가한다. 결혼 이후 그는 학문에 더욱 정진한 것으로 보인다. 모친의 권유로 과거를 준비해 1552년(명종 7)에는 초시(初試)에도 합격했다.

본격적으로 학문에 매진하기 위함이었을까. 2년 뒤 그는 팔거(칠곡) 사수에 서실을 지었다. 달성에서 꽤 떨어진 곳에 공부방을 만든 건 사수의 이름이 좋아서였다고 한다. 사수는 공자가 태어나 강학한 곳의 지명이기도 하다.

1555년(명종 10) 봄, 그는 선친의 묘소가 있는 연화산 아래 연화재를 짓고 또다시 공부에 전념했다. 그가 연화재를 지은 연유는 부친에 대한 회한과 사모의 감정이 작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정사철이 성리학에 관한 서적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연화재에 우거하면서다. 당시 연정 서형, 남간 서식 형제와 송담 채응린, 계동 전경창 등이 방문해 강학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대구지역 유학의 선구자

1562년(명종 17) 그에게 또 한 번 시련이 찾아온다. 홀로 남은 모친마저 타계한 것이다. 애끓는 마음으로 3년간 여묘살이를 마친 그는 1568년(선조 1) 연화동에 임하초당(林下草堂)을 짓는다. 이때부터 임하라는 호를 사용하게 된다. 정사철이 학문에 큰 정진을 이룬 곳이 바로 임하초당이다. 16년간 거주하면서 강학에 매진했다.

1571년(선조 4)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임하초당을 방문했는데, 정사철은 그가 13세아래임에도 도의로 사귀었다고 한다.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정구와 교유하며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대해 크게 깨닫고 성리학 관련 서적을 섭렵하며 깊이 탐독했다. 이황(李滉)을 사숙(私淑)해 퇴계학을 추구했으며, 도산으로 가서 직접 배우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는 특히 유학의 경전 중에서 소학과 주역을 중시했다. 뿐만 아니라 성리학과 관련된 서적인 서경·심경·근사록·주자서절요 등을 연구했으며, 예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정사철의 가장 큰 업적은 강학 장소를 지속적으로 마련해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는 점이다. 1587년(선조 20) 금호강 하류에 선사서사(仙査書社·선사서당)를 짓고 강학했는데 수많은 수재(秀才)들이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곽재겸(郭再謙)·손처눌(孫處訥)·서사원(徐思遠)·도원결(都元結)·윤인협(尹仁浹)·채몽연(蔡夢硯)·곽대덕(郭大德)·주신언(朱信言) 등이 그를 좇아 함께 지냈다.

더욱이 그는 같은 해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됐으나 나아가지 않고, 후학들을 모아 강학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택했다. 일생 성리학을 배우고, 그 가르침을 후대에 전하는 삶을 실천한 셈이다. 선사서사(서당)는 연경서원과 더불어 대구 유학의 르네상스를 열게 한 강학 장소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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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군 다사읍 연화산 자락에 위치한 임하 정사철(위쪽)과 낙애 정광천의 묘소.

◆지역 의병장으로 추대

1592년(선조 25) 조선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다. 일본이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달라는 구실로 전쟁을 벌인 것. 전란 발발 무렵 정사철은 대구 유림의 최고 지도자였다. 당시 지역 유림을 대표한 인물은 그 외에도 전경창, 채응린이 있었지만 두 명 모두 사망한 터였다. 앞서 채응린은 1584년 금호강변 왕옥산 기슭에 자리 잡은 압로정(狎鷺亭)에서 세상을 등졌고, 이듬해 전경창마저 한양 여저(旅邸)에서 숨을 거뒀다.

이에 지역 인사들은 임진년 7월6일 팔공산 부인사에서 공산의진군(公山義陳軍)을 조직하고, 정사철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또한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도 그를 소모관(召募官)에 임명했다.

하지만 정사철은 직을 수행할 몸상태가 아니었다. 63세의 나이로 최고령 유학자였던 그는 종환(腫患)으로 거동이 불편했다. 결국 그는 열흘 뒤 노비 둘을 시켜 '다리에 난 종환 때문에 향병(鄕兵)대장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전갈을 부인사 의병소로 보내 직을 거절했다.

공산의진군 의병장은 그의 문하인 낙재(樂齋) 서사원이 대신했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지만 전세는 여전히 불리했다. 정사철은 이듬해 봄, 거창으로 몸을 피했다가 전염병에 걸려 별세했다. 향년 64세였다. 대구 유학의 선구자였던 그는 3권 1책의 '임하실기(林下實記)'와 4권 1책의 문집인 '임하집(林下集)'을 남겼다. 사후 170여 년이 지난 1764년(영조 40) 그를 배향하는 사당인 금암사(琴巖祠)가 세워졌고, 금암사는 1786년(정조 10) 금암서원(琴巖書院)으로 승격됐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정사철의 아들인 정광천은 1553년(명종 8) 세상에 첫발을 내디뎠다. 아버지가 나고 자란 달성 하빈면 동곡에서 첫 울음소리를 터트렸다. 정광천의 자는 자회(子晦), 호는 낙애(洛涯)·송파(松坡)다. 벽진 이씨와 결혼해 슬하에 4남2녀를 뒀다. 그는 가학을 계승(家學)하고, 계동 전경창을 사숙(私淑)했다. 또한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부친과 정구의 영향을 받아 소학을 자신을 다스리는 요체로 삼았다고 한다. 또 염락관민과 같은 성리서적을 두루 섭렵했다.

정광천은 가사와 시 작문에 능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부친을 비롯해 낙재 서사원, 송재(松齋) 주신언(朱愼言)과 함께 팔공산을 유람한 뒤 남긴 연작시 유팔공산십수(遊八公山十首) 등이 있다. 그는 부친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것으로 보인다. 1586년(선조 19)에는 낙동강 동쪽 물가 '아금(牙琴)'이라는 바위에 누대를 짓고, 부친과 함께 생활하며 유유자적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바로 곁에서 보필한 영향일까. 그의 효심 또한 남달랐다. 1590년(선조 23) 정사철이 병에 걸리자 지극정성으로 병간호를 했으며, 회갑연까지 준비한 뒤 연수곡(延壽曲)을 지어 부친을 기쁘게 했다고 한다.

효행만큼 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강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다. 부친이 의병장으로 추대될 때 그는 하빈면 남면장이 됐다. 의병을 일으켜 경남 창녕(昌寧)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교전 중인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그는 부친이 피란길에 오르자 곁을 지켰다. 대구는 한양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있어 왜군 주력부대가 머물렀고, 지역 유림들은 피란을 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부친이 거창에서 타계한 뒤 이듬해 그 역시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지은 술회가 6수와 병중술회가 3수 등을 비롯한 '낙애일기'와 3권 1책의 낙애집(洛涯集)를 남긴 채 부친과 함께 금암서원에 배향됐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문헌= 대구의 뿌리 달성, 제5권 달성에 살다. 향토문화전자대전. 임하 정사철과 낙애 정광천 선생, 구본욱, 학이사.

▨자문= 송은석 대구문화관광 해설사

공동기획=달성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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