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예술의 도시란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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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8-18  |  수정 2020-08-18 08:16  |  발행일 2020-08-18 제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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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 대구미술관 학예연구사

베를린에서 1년간 지낼 기회가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보이는 추모공원 인근에 살았는데, 옥상에서 내려다보면 장벽 앞 좁은 도로를 기점으로 나누어진 옛 동독과 서독, 엄밀하게는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루는 관광객 차림의 한 무리가 옆집 대문 앞에 둥글게 서서 묵념을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 가보니 둘러싼 바닥에는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사각 동판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이것의 이름은 슈톨퍼슈타이네. 직역하면 '걸림돌' '장애물'이란 뜻이다. 가로세로 10㎝ 사각 동판에는 '여기에 살았다'를 시작으로 이름·출생 연도·추방일·지명·사망일 순으로 새겨져 있다. 베를린 출신 작가 군터 뎀니히가 나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1992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온 '걸림돌 프로젝트'다. 동판에 새겨진 이들은 나치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 이름이다. 작가는 누군가의 존재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금속에 박은 돌을 우리가 내딛는 그 땅에 단단히 박았다. 이 '걸림돌' 은 나치가 명령한 정해진 주거지로 이동하기 전까지 희생자들이 살던 마지막 거주지 앞 보도에 설치된다.

비록 살고 있는 시간대는 다르지만 내 이웃 누군가에게 일어난 비극인 것이다. 사각 동판의 의미를 알고 난 후로 나는 무심코 내가 살고 있는 이 장소가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베를린 장벽 위로 쏟아지는 햇살을 친구 삼아 낭만과 자유만을 만끽했던 자리는 분단의 아픔, 이념의 대립, 이산, 자유를 향한 피의 역사가 있는 곳이다. 베를린에 있는 동안 한국의 분단 현실이 남의 일이 아님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작가의 의도는 그야말로 정곡을 찌른다. 한 작가가 시작한 프로젝트는 전 세계로 뻗어 현재 7만개 이상의 걸림돌이 시와 단체의 후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베를린은 역사가 낳은 상흔을 가장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예를 잘 보여주는 도시다. 사실 어떻게 보면 잔인한 역사를 가진 독일이 세계 사회에서 인정받고 제대로 서기 위해 속죄하고 반성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픈 과거사를 관조하기보다 예술을 통해 인간을 성찰하게끔 하는 방식은 본받을 만하다. 지금도 그 자리에 있을, 베를린 옆집 대문 앞에 박힌 여섯 개의 걸림돌에 오늘도 따뜻한 햇살이 비치기를.

이정민〈대구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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