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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북 '계류도', 종이에 담채, 28.7×33.3㎝, 고려대박물관소장. 초현실주의 그림 같은 물난리를 위로하는 '계류도'의 물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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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희 (화가) |
엎친 데 덮쳤다. 코로나19의 공포 속에 물 폭탄까지. 50여 일의 긴 장맛비에 세상이 잠겼다. 산사태로 삶의 터전이 사라지고, 물난리로 소가 지붕 위에 얹혀 있는 초현실주의 그림 같은 세상이 펼쳐졌다.
눈을 뜨면 비 소리부터 감지하는 나날의 연속이다. 오늘은 다행히 비가 멈췄다. 얼른 산으로 향했다. 습기 찬 숲 사이로 햇살이 비친다. 모처럼의 광경에 마음이 황홀하다. 그 신비감도 잠시. 조금 올라가니 낙원은 전쟁터로 변했다. 폭우에 찢겨지고 넘어진 나무와 축 처진 이파리들이 퍼렇게 질려 있다. 패잔병처럼 안간힘을 다한 나무들의 몰골이 애처롭다. 바닥에는 찢겨진 이파리와 가지들, 설익은 도토리가 흩어져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거미줄처럼 깊게 패인 물살이 길을 만들어놓았다. 한여름의 무더위를 식혀줄 계곡도 흙탕물 투성이다.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 1712~1786년경)의 '계류도(溪流圖)'를 떠올리게 하던 숲은 난장판이 되었다.
최북의 '계류도'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의 시를 보고 그린 시의도(詩意圖)다. 최치원이 가야산 독서당에서 읊은 시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은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狂奔疊石吼重巒)/ 지척의 사람 말도 분간하기 어렵구나(人語難分咫尺間)/ 세상의 다투는 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却恐是非聲到耳)/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에워싸게 했노라(故敎流水盡籠山)"로 끝난다. 최치원이 말년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자연과 더불어 물소리에 귀 기울이던 은둔생활을 시로 남긴 것이다. 최북 역시 세상의 시름을 잊고 자연과 벗하며 살고자 이 그림을 그린 것 같다.
최북은 조선시대 후기 그림을 팔아서 생계를 잇는 직업 화가였다. 조선 후기에는 사대부 화가 못지않게 직업 화가가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시대가 되었다. 중인 신분이었던 최북의 삶은 순탄하진 않았다. 가난이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호생관은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호에서 투철한 직업정신이 느껴진다. 그는 자신의 이름인 '북(北)'자를 풀어서 '칠칠(七七)'이라고 낮추어 불렀다. 시·서·화에 능하여 당대 명사들과 교유하며 개성적인 예술세계를 펼쳤다.
'계류도'는 사선을 경계로, 위쪽에는 경물을 그리고 아래쪽에는 화제(畵題)를 배치했다. 사선 위쪽으로 깊은 산을 여백으로 처리하고, 계곡에서 흘러온 물이 바위를 휘감아 흐르게 그렸다. 물안개 자욱한 가운데 흐르는 물소리가 요란하다. 기교를 멀리 한 탓에 작품이 담백하다. 최치원의 소박한 삶이 겹쳐진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아래 언덕 왼쪽에는 최치원의 시 중 3·4구를 반행(半行)의 흘림체로 쓰고, 호생관 아래 낙관을 했다. 서체는 반듯하면서도 물과 같은 기운이 감돈다.
갈필로 산과 언덕은 다소 거칠게 묘사하고, 물기 가득한 붓으로 점을 찍어 계곡을 표현했다. 깊은 골짜기에서 흘러온 물은 짙은 먹색으로 바위와 돌을 묘사하는 바람에 더 맑아졌다. 측필로 빠르게 언덕을 그리고, 몇 개의 옅은 묵점으로 붓을 놓았다. 대부분 여백으로 처리한 화면에 옅은 먹으로 계곡을 표현했음에도 노련한 필묵이 시정과 운치를 더한다.
최북은 화조화, 영모화, 산수화, 정물화 등 다양한 장르에 능했다. 특히 산수화에 뛰어난 면모를 보였고, 서예에 두각을 보이며 시서화가 어우러진 남종화풍을 그린 특출한 화가였다. 술을 좋아한 그는 숱한 기행을 남긴 '기인화가'였고, 그림 한 점 팔아서 끼니를 해결할 만큼 가난한 삶이었지만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자세로 살았다.
물방울이 모여 물줄기를 이루고 계곡을 적신다. 맑고 시원한 계곡물은 생명의 근원이자 평온한 휴식처이기도 하다. 그러나 물이 모자라거나 과하면 해를 끼친다. 자연의 양면성은 언제 드러날지 모른다. 자연에 순응하되 적절히 운용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무분별한 개발과 숲의 훼손은 자연재해를 재촉할 뿐이다.
텔레비전에 비친 산사태와 흙탕물이 머리를 떠나지를 않는다. '계류도'의 물처럼 세상이 다시 맑아지기를 기대해본다.
화가 2572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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