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태의 줌人] 지역노동투쟁의 '선봉' 김위상 한국노총 대구지역본부 의장

  • 유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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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9-11   |  발행일 2020-09-11 제35면   |  수정 2020-09-11
노동존중 쟁취 최전선에서의 32년 "권익 향상 위한 투쟁은 즐겁다"
한국노총은 민주노총과 함께 우리나라 양대 노총이다. 만주노총에 비해 한국노총은 전신인 대한노총때부터 지금까지 대부분 온건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그런데 김위상(61) 한국노총 대구지역본부 의장은 민주노총 사람같다. 1989년부터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 든 김 의장은 투쟁이 즐겁다고 말한다. 8년째 한국노총 대구지역본부 의장과 18년 동안 전국택시산업노동조합 대구지역본부 의장을 맡으며 굵직굵직한 싸움의 선두에 있었고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4년 전에는 옥중에서 전국택시산업노조 대구지역본부 의장에 출마해 당선되는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초근목피'로 목숨을 부지하며 살기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쳤던 소년시절, 공장을 전전하며 생존에 매달려야 했던 청년시절을 겪으면서도 김 의장은 한번도 책을 손에서 놓아 본 적이 없다. 검정고시로 중등과정을 거친 김 의장은 만학도라는 이름으로 대학을 졸업했으며 지난해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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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투쟁 현장의 전위에 선 김위상 한국노총 대구지역본부 의장. 〈한국노동대구지역본부 제공〉
온건노선 견지하는 한국노총
김 의장은 비교적 '강경파'
법률 상담·노조활성화 노력
노조간부 등 교육에도 중점

생계위해 중학교 자퇴만 2번
검정고시로 中高과정 마치고
방송통신대서 경일대로 편입
계명대 경영학 석사학위 취득

1984년 택시기사로 '戰線'에
택시노조지부장 3번 낙선 후
다음 14번 선거서 모두 당선
2007년에는 '옥중당선' 기염

영세업체의 비율 높은 대구
노사협력 브랜드化에 노력
서로 양보하면서 평화 유지

84년 택시노동자사태 등 사건
척박한 환경서 과격한 투쟁
노동·경제 점차 악화됐지만
노동자의 희생 덕에 안정화


▶2013년부터 8년째 한국노총 대구지역본부 의장직을 맡고 계신다. 그동안 한국노총 소속 노동자들의 권익향상을 위해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

"'현장과 함께 시민과 함께' 라는 구호를 전면에 내세워 한국노총 대구지역본부 의장에 당선되면서부터 현재까지 척박한 지역노동현장의 최선봉에서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뛰어다녔다. 노동자들이 각자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일한 만큼 제대로 대우받을 수 있는 노동환경을 만드는데 누구보다도 앞장서 왔다고 자부한다. 노동자들의 권익향상을 위해 무엇보다 먼저 노동법률 상담과 노동조합 활성화를 꾀했다. 노동관련 상담활동과 조합원·노동조합 간부 교육 그리고 비정규직노동자 교육에 무게 중심을 두고 중점적으로 실천에 옮겼다."

▶2018년 12월 제14대 한국노총대구지역본부 의장에 당선되셨을 때 대구지역에 건립 중인 '노사평화의 전당' 완성과 지자체와의 정책연대를 굳건히 해 지역에 새로운 노동환경을 만들겠다고 강조하셨다. 2년8개월여가 지났다. 어느 정도 성과가 있으셨는지.

"대구지역은 2·3차 협력업체 등 중·소 영세기업이 95%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타 지역보다 노동환경이 좋지 않다. 노동자들의 임금도 1인당 4만~50만원 정도 낮다. 이러한 지역현실에서 저는 어떻게 하면 우리 지역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높여 줄 수 있을까 깊이 생각한 끝에 대구를 노사화합의 도시, 노사협력의 도시로 브랜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통해 타 지역에 있는 대기업과 외국인 투자기업을 유치하면 기업생태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기업이 발전하고 노동자들도 함께 잘살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노사가 조금씩 양보, 산업평화를 유지해 왔다.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13년부터 3년 연속 전국 노·사·민·정 협력 최우수 자치단체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정부도 이를 인정,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에 건설 중인 대구 노사평화의 전당 건립 예산을 지원했다. 노사평화의 전당은 2021년 4월 완공된다. 노사평화의 전당이 우리 지역의 노사화합·협력 메시지를 잘 담아내고 이를 국내·외에 널리 홍보해 대구지역의 노동환경 수준을 한 단계 더 끌어 올려 줄 것으로 기대한다. 이번 임기 중에 원·하도급 협력업체 동반성장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하도급법 개정이 입법 청원되도록 지속적으로 협의하고 노력하고 있다. 생산현장에서 근무하거나 사무직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근골격계 질환으로 많이 고생하고 있다는 걸 감안해 전국최초로 '건강증진프로그램'을 도입했다. 노동자들의 생활문화 활동을 지원해 일상적으로 문화를 향유하고 삶의 질을 한 단계 더 향상시킨다는 목표로 '노동자생활문화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대구는 다른 지역에 비해 노·사관계가 비교적 원만하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시는지.

대구는 전태일 열사의 고향이다. 원래 노동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던 곳이었다. 대략 큰 사건만 열거해도 △1984년 대구택시 노동자사태 △1985년 6월1일 한국노총 노동법 개정추진 중앙 궐기대회△1994년 대구택시 총파업, 상신브레이크 파업 등이 있었다. 노동환경에서 오는 재정부담 가중을 우려하는 중·소 영세기업 사용자와 노동자의 갈등으로 만들어진 우리 지역의 척박한 노동환경이 과격한 투쟁을 불러일으키면서 대구지역 노동환경과 경제현실은 점점 악화돼 갔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사 양측 모두 조금씩 양보·협력하기 시작했고 둘의 관계는 갈수록 안정을 되찾아 갔다. 하지만 언제까지 양보와 희생만 할 수는 없다. 그동안 우리의 양보와 희생으로 노·사 안정을 이루어냈고 이를 기반으로 지역산업이 한 단계 발전한 만큼 우리 노동자들이 많은 공헌을 해왔다고 자부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맡은 자리에서 묵묵히 제 할 일을 다한 우리 노동자들을 돌아봐 줄 때도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지난 7월말 22년만에 '노사정 사회적대화'에서 마련한 사회적 협약이 민주노총의 협약 거부로 무산됐다. 한국노총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시나.

"전대미문의 위기 속에서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사회적 대화에 참여해 온 한국노총으로서는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노총은 코로나19가 시작되자마자 위기를 온몸으로 겪고 있는 중·소 영세사업장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등 취약노동자들을 위해 법정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통해 대안을 요구하고 마련해 왔다. 이런 가운데 한국노총이 원 포인트 사회적 대화에 참여한 것은 경제사회주체로서 가지고 있는 막중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고용 불안의 한가운데 놓여있는 노동자들에게 하루하루는 한숨과 고통의 시간이다. 이 대화를 처음 제기한 정부와 민주노총은 사회적 대화가 이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고 소모의 시간으로 끝난 것에 대해 사과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비록 최종합의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잠정 합의된 내용들은 다행히 경제사회노동 위원회에서 충실히 논의됐고 합의됐다. 합의된 내용에 따라 반드시 실행돼야 할 것이다. 노사정 협약 전문에 '위기 극복과정에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됐던 과거의 전철을 반복하지 않도록 보호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촘촘하게 마련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언제부터 노동운동을 하게 됐으며 계기가 있으신지. 선거에서 좀처럼 지지 않는 이력을 갖고 계신 걸로 알고 있다.

"1984년 택시 운전대를 잡으면서 참여했다. 저의 참여가 주어진 환경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는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사업주들과 끊임없이 대립각을 세웠다. 1989년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지도부 선거에 뛰어들었지만 1994년, 1997년, 2000년 내리 3번 전국택시조합연맹 대구지부장(현 전국택시산업노동조합 대구지역본부 의장)선거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지금까지 14번의 각종 선거에서 모두 이겼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2007년 1월에 치렀던 전국택시산업노동조합 대구지역본부 의장 선거다. 옥중에서 당선됐다. 옥중에서 서신 선거운동을 했다. 1년 동안 1천여명의 조합원에게 '왜 갇혀 있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편지를 보냈고 결과는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때 일은 노동운동을 지속하게 된 자양분이 됐다. 노동자들을 절대 배신하면 안된다는 걸 마음에 새기고 지금까지도 노동자들과 함께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유·소년시절을 보냈지만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대단한 학구파로 알려져 있다.

"청송군 주왕산면 얼음골이 고향이다. 쑥으로 죽 끓여먹을 정도로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다. 11살때 어머니와 큰누나는 서울로, 작은 누나는 부산으로 식모살이 하러 가셨다. 초등학교 5학년때 어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상경, 동대문구 창신동에 살았다. 서울에는 집들이 좋은 줄 알았는데 시골 초가보다 못했다. 정미소 기름종이로 방 천장을 꾸민 집에서 살았다. 식모생활을 그만둔 어머니는 과일 노점상을 시작하셨고 그런 어머니를 도우며 초등학교를 마쳤다. 동대문중학교에 입학했지만 1년도 안돼 자퇴하고 신문배달 등 안해 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생존을 위해서다. 2년 뒤 대구로 와 경신중학교에 입학했다. 저보다 2살 어린 동생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 3학년 때 공군기술고등학교에 진학하려 했지만 나이가 초과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자퇴했다. 중학교만 두 번 자퇴했다. 18살때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했다. 직조공장, 비닐공장 등을 전전했고 달서구 감삼동에서 포장마차를 하기도 했다. 포장마차를 할 무렵부터 책을 잡았다. 리어커를 끌며 생계를 이어가더라도 배울 수 있다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고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치고 택시 노동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방송통신대에 진학했다. 신호대기하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하루에 무조건 '22000 버캐버러리' 단어 5개씩 외운다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했다. 방통대 졸업한 뒤 2004년 경일대 행정학과에 편입했고 2017년 계명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노총 대구지역본부 소속 노동자들을 위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

"우리 노동자들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떠한 노동환경에서 어떤 대우를 받으며 일을 하는지도 매우 중요하다. 저는 제가 하는 모든 활동이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의 권리가 존중받는 일터 만들기의 기본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대구시,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 노동자 중심의 정책을 시행하는 그날까지 이러한 노동권익 보호활동을 지속적으로 해나갈 것이다. 저는 조직의 대표자들이나 적어도 노동조합 간부들이라면 노동관련 법 등은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법을 잘 몰라서 노동조합 활동을 제대로 못한다거나 조합원의 권익을 보호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다. 앞으로도 더욱더 노동자들이 억울한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눈높이 노동관련 법 교육과 법률 상담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도록 하겠다. 아울러 노동조합이 없는 5인 미만 영세사업장 소속의 노동자들을 더욱 세심히 보살펴 '사람이 우선이 되는 노동환경'이 조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이와 함께 노동존중 대구시가 될 수 있도록 노동의 선봉에 서서 최선을 다하겠다."

유선태기자 youst@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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