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아파트 빤스맨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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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9-16  |  수정 2020-09-16 08:07  |  발행일 2020-09-16 제22면

이하미
이하미〈연출가〉

우리 가족은 재작년, 15년 만에 이사를 했다. 아파트는 처음이어서 이래저래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그중 유독 아버지가 적응하지 못 하신 게 '도어록'이었다. 숫자 네 자리일 뿐인데도 아버지는 어렵다며 번호를 외우는 대신 출입카드를 꼭 들고 다니셨다. 그해 겨울 어느 날, 가족은 모두 출근했고, 아버지도 나갈 준비를 하다가 문득 반품 택배가 기억났다고 한다. 택배만 문밖에 두면 됐기 때문에 귀찮았던 아버지는 한 발을 현관에 걸고 몸만 내밀어 상자를 내놓으셨는데, 어쩌다가 본인도 모르게 발을 문에서 빼셨다. 문은 허망하게 닫혔고…. 그런데 아빠는 하필 트렁크만 입으신 상태였다. 영하 8℃의 날씨에 팬티 바람으로 집밖에 덜렁 내쫓긴 것이다. 아버지는 누가 볼세라 일단 비상구로 가셨다. 창밖의 경비실을 하염없이 보며 '저기까지 뛰어가면서 아무도 맞닥뜨리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 이내 윗집 이웃이 생각나셨다. 한두 번 인사로 안면은 튼 사이라서 전화 한 통만 빌리고자 살금살금 올라가서 초인종을 누르셨다. 다만 그 집이 아주머니 혼자 사는 집인 줄을 몰랐다. 난데없이 팬티 바람의 아저씨가 초인종을 누르자 놀란 아주머니는 비명을 지르며 경비실에 신고하셨다. 아버지는 당황해서 집 앞으로 도망갔다가 와중에 옆집 아주머니까지 맞닥뜨리는 비극을 겪게 된다. 출동한 경비원에게 겨우 사정을 설명하고 휴대폰을 빌려 어머니에게 비밀번호를 물어 들어가셨다고 한다. 그날 저녁에야 이야기를 듣게 된 우리 가족은 모두 아버지 번호를 'OOO아파트 빤스맨'이라고 저장해 뒀다. 라디오 사연에 어울릴 법한 재미난 일화다.

그런데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그날 아버지가 '빤스맨'이 되어 쫓겨났던 곳이 단순히 아파트 복도였을까. 세계 어느 곳보다 급격한 변화를 겪은 우리나라지만,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도구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뀐 것은 정말이지 다른 차원의 현상이다. 세상의 새로운 것을 체득하는 과정이 우리를 젊게 유지한다는 생각을 한다. 비밀번호 네 자리를 외우기도 꺼리게 되는 이 세상의 속도가, 아버지의 마음을 좀 더 빨리 늙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일종의 '기술 난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꽉 부여잡지 않으면 혹은 맞춰서 더 전력 질주를 하지 않으면 빤스 차림으로 도태될 것만 같은 이 속도감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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