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이윤영 '녹애정(綠靄亭)'

  • 유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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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9-25   |  발행일 2020-09-25 제37면   |  수정 2020-09-25
마스크에 번지는 가을의 피톤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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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에 담채, 34.6×55.2㎝, 간송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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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짱한 열기도 식었다. 청정한 가을의 기운이 마스크 안으로 들어왔다. 혈기왕성하던 녹색은 뉘엿뉘엿 저물어 산의 색깔을 바꾼다. 코로나19로 심신이 지친 이들을 팔공산이 보듬어준다. 팔공산은 대구의 심장이다. 팔공산 자락은 예술가들의 정착지로 유명하다. 산의 정기를 받으며 자연을 벗 삼아 작업하기에 좋은 환경이다. 화가라면 누구나 산세 좋은 곳에 작업실을 지어서 안착하길 원한다. 조선시대 화가들도 그랬다. 산세가 뛰어나고 물 흐르는 곳이면 화가들이 모여들었다. 젊은 시절에 이미 자연에 은둔하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린 단릉(丹陵) 이윤영(李胤永·1714~1759)이 있다. 관직과 명예를 뒤로한 채 문학에 심취한 그는 진경시대의 사상을 오롯이 시와 그림에 담았다. 작품 '녹애정(綠靄亭)'은 은유 자적하던 그의 화실 전경을 담고 있다.

이윤영은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의 후손으로 학식을 갖춘 고매한 선비였다. 당시 현실 정치에 뜻이 맞지 않아 일찍이 출사를 거부하고 경관이 아름다운 자연을 가까이하며 단양에 칩거한다. 단양의 절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시를 연작으로 짓고, 빼어난 그림솜씨를 구사하여 그림을 그렸다. 문집으로는 '단릉산인유집(丹陵山人遺集)'과 '단릉유고(丹陵遺稿)'가 있다.

젊은 시절 은둔한 탓에 이윤영에 관해 단독으로 조명한 기록은 없지만 동시대인의 문집에 산재해 있다. 일몽(一夢) 이규상(李奎象·1727~1799)이 쓴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을 보면 "이윤영을 그림과 시문에 뛰어난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문인화가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1710~1760)과는 그림에 화제를 주고받았으며, 진경시의 대가 이병연(李秉淵·1671~1751) 등 문사와 교류하며 시회를 즐겼다.

'녹애정'은 푸른 아지랑이가 깃든 정자로 화가의 고고한 인품을 보여주는 화실의 모습이다. 화가는 사계절 피는 꽃과 나무를 심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멋스럽게 만들었다. 가지런히 울타리를 쌓고 경치 좋은 곳에 돌로 축대를 높게 올려 초당을 배치했다. 손수 화실을 꾸미면서 작업에 매진하는 화가의 일상은 작품이 된다.

'녹애정'은 짙은 녹음을 뽐내고 있지만 서늘한 가을을 예비한 듯한 풍광이다. 때마침 본건을 쓰고 붉은 도포를 입은 선비가 당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고 있다. 곁에는 시동이 동행 중이다. 주인은 손님 맞을 준비로 분주하다. 초당 안의 탁자에는 다기를 올려놓았다. 드디어 손님의 기척이 들린다. 손님은 절친인 김무택(金茂澤 1715~1778)이다. 자가 원박(元博)이고, 호는 동강거사(桐岡居士)인 김무택은 한성부판관을 지낸 문인이다.

그림의 오른쪽 아래에는 기괴한 바위 사이로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계곡에서 꼬리치며 흐르는 물은 화가의 심금을 울린다. 울타리 넘어 정갈한 마당에는 화가가 좋아하는 나무가 울창하다.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에 초당이 있다. 친구를 기다리다 지친 주인은 마당 어딘가를 거닐고 있는지 초당은 비어 있다. 다리를 건너는 선비의 표정이 환하다. 시동은 눈앞에 펼쳐진 목적지에 발걸음이 가볍다. 당나귀도 마지막 힘을 내고 있다.

왼쪽 화면 공간에는 "1743년 여름 녹애정에서 친구 김원박을 위해" 그렸음을 밝히고, 낙관을 했다. 화면 왼쪽에는 절묘한 바위를 첩첩이 쌓아 짜임새 있게 배치했다. 바위에는 이인상의 화제가 적혀 있다. "필치가 빼어나고 우아하며 짙고 자세함이 알맞아 좋아할 만하다. 윤지(이윤영)가 근래 단양의 산속에 목석(木石)의 신도(神道)를 만들었는데, 또한 준수하고 예스러우며 뛰어나고 빼어나 다시 한 번 붓을 대게 만든다. 갑술년(1754) 가을에 원령(이인상) 쓰다." 이 작품은 30세의 여름을 보내는 이윤영이 친구 김무택과 이인상이 어울려 시와 그림을 주고받은 일상을 그린 것이다.

이윤영은 은일처사로 평생 그림과 시에 매진하며 자신을 다스렸다.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친한 벗이 있어 감동받는 인생이었다. 행복은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고 느끼는 것이다. 그는 진경시대의 화려한 화풍에 휩쓸리지 않고 그만의 고아한 필치로 이색화풍을 선사했다.

팔공산의 초가을은 마스크의 물결이다. 마스크의 일상은 자연과 사람에 대한 거리를 겸손과 배려로 채워준다. 시대의 아픔을 견디는 것도 현명한 삶의 길이다. 피톤치드 가득한 나무마다 노랗고 빨간 가을이 입질하고 있다. 화가 2572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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