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의 연필의 무게 걸음의 무게] 빙허(憑虛) 현진건(玄鎭健) (1900~1943)

  • 유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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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0-16   |  발행일 2020-10-16 제38면   |  수정 2020-10-16
1920년대 최고 사실주의 작가의 '술 권하는 세상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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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 가족

대구 現 중구 계산동 4남 중 막내 출생
팔봉 김기진, 조선 최고 주정뱅이 회고
글 쓸때면 그 좋아하는 술 멀리 하며
조선어대사전 품고 철저한 어휘 선택
빈처·B사감과 러브레터 등 수작 발표
동아일보 재직 시절, 편집 귀재라 칭송

오욕 만연한 시대, 親日과 담쌓고 지내
독립운동 셋째형 옥사소식에 절필도
일제 탄압에 의한 미완성작 '흑치상지'
죽마고우 이상화 등과 두류공원 詩碑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이 조선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알았소? 팔자가 좋아서 조선에 태어났지. 딴 나라에서 났다면 술이나 얻어먹을 수 있나…" 아내는 남편이 말하는 사회가 무언지 모른다. 어찌하였든, 딴 나라에는 없고 조선에만 있는 요릿집 이름이려니 하고 치부한다. …아내는 절망한 어조로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팔봉(八峯) 김기진은 빙허(憑虛)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을 조선 최고의 주정뱅이라 회고한다. '농담 잘하기로는 나도향이 으뜸이오, 술주정하면 현진건, 연애박사에는 노자영, 의뭉하고 입담 좋기로는 방정환, 재담 잘하기로는 박영희가 으뜸이었다. 이상화는 인생에 대한 태도가 경건했다.'(신천지, 1954년 9월호) 하지만 현진건의 유일한 혈육인 딸 화수를 맏며느리로 맞은 사돈 월탄(月灘) 박종화는 빙허가 주정뱅이가 아니라 불평이나 아니꼬운 사람이 있으면 짐짓 취한 채 부리는 가짜 주정이라 주장한다.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명월관에서 있었던 사원들끼리의 송년회식 자리에서 동아일보 사장에게 "이 놈아, 먹어, 먹으라고"하며 술을 권하다가 급기야 뺨까지 때렸다. 하지만 사장은 현진건을 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다만 이때 현진건에게 뺨을 맞았던 사장이 송진우였는지 김성수였는지는 사람마다 증언이 다르다. 더군다나 이 두 사장은 빙허의 장례식에서 관을 부여잡고 대성통곡했다 전해진다.)

현진건은 1900년 9월2일 대구군 서상면 계산리(현 중구 계산동2가 169번지)에서 구한말 통신업무를 관장하는 전보총사 주사직과 의정부 중추원외랑을 거처 정삼품 관직인 대구전보사장(大邱電報司長)을 지내다 대구에 눌러앉은 현경운의 4남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다.

어려서부터 자의식이 강했던 소년은 열 살 때 어머니를 여의지만, 대한제국의 육군 참령과 외국어학교 부교관, 칭경시예식사무위원(稱慶時禮式事務委員)을 지낸 맏형 홍건, 일본 메이지대 법학과를 졸업한 변호사 석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하던 정건 등 세 형의 보살핌으로 굳건하게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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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의 부인 이순득(오른쪽)

서당에서 수학하다가 1911년 전보사장에서 물러난 현경운이 샘밖골목(현 금호호텔 근처)에 개설한 대구노동학교를 다녔다. 15세 때 이상화의 가까운 친척인 경주 갑부의 딸 이순득과 결혼하여 처가인 대구 수동(현 인교동) 255번지에서 신혼생활 중 도일, 도쿄 세이소쿠예비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다 1917년 대구로 돌아와 백기만, 이상화, 이상정과 동인지 '거화'를 발간한다.

이때부터 현진건은 스스로 아호 빙허(憑虛)를 지어 사용했는데 '허공에 의지한다'는 이 말은 북송(北宋)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 가운데 '넓기도 하구나,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타고서(浩浩乎! 憑虛御風而)'란 구절이 당시 자신의 심경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었다고 그 유래를 1930년 '삼천리'지에 밝힌다.

1917년 빙허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세이죠오중학교 3학년에 편입했으나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없어 졸업을 앞두고 귀국해 버린다. 그러다가 곧 집안 몰래 셋째 형 정건을 찾아가 상하이 후장대 독일어 전문부에서 공부하다 이것도 몇 달 만에 집어치우고 당숙에게 입양하기 위해 귀국, 아내와 서울로 올라간다.

개벽
현진건의 단편소설 타락자·빈처 등을 실었던 개벽 표지.

1920년 '개벽' 5호에 '희생화'를 발표해 혹평을 받지만, 절치부심하여 이듬해부터 '빈처' '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 '할머니의 죽음' '운수 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 '고향' '사립정신병원장' '불' 등을 발표하여 대구 태생으로 휘문·배재 출신의 서울 문인들 사이에서도 당대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20년 조선일보사, 최남선이 만든 동명사(東明社)를 거쳐 시대일보의 사회부장이 되었으나 폐간되면서 1925년 동아일보사로 전직, 3년 만에 사회부장이 되어 1936년 베를린올림픽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검거, 투옥, 출소한 1937년까지 근무한다. 재직 시절 신문 대장을 놓고 제목을 붙이는데 '편집 칠팔 명이 모여선 중에 붉은 잉크를 붓에 덤뻑 찍기만 하면 민각을 누연치 않고 진주 같은 제목명을 이곳저곳에 낙필 성장으로 비치듯 떨어져서, 선후배들로 하여금 그 귀재에 혀를 둘러 감탄케 할 지경'이라는 명성이 나돌았다.

또한 그에게는 '조선의 안톤 체홉'으로 지칭되는 등 늘 작가로서 인간으로서 거의 흠결 없이 살았단 수사가 따라붙는데, 이는 글을 쓸 때 그 좋아하는 술을 입에 대지도 않고 조선어대사전을 품고 살 정도로 낱말과 어휘 선택에 철저했다든지, 소위 구여성과의 조혼을 괴로워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데서 온 당시 지식인들의 '딴집 살림' 같은 공공연한 퇴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내에게만 충실했던 빙허의 삶에 대한 염결성 때문이다.

특히 미두, 투자 사기로 인한 말년의 궁핍 외엔 비교적 유복한 삶을 산 그가 마치 실제 겪은 듯 식민지 치하 하층민들의 참혹한 현실을 글에 녹여내자 계급주의 문학을 옹호하는 카프 등의 칭송을 받지만, 단호하게 작가 일인일당(一人一黨)주의를 피력하며 작품의 내용과 계급적 가치는 별개라는 뜻을 피력하기도 한다.

이광수, 최남선, 김동인, 주요한 등 당시거의 대부분 작가들이 친일 이력에서 자유롭지 않고 친인척 몇몇 또한 그 혐의를 받지만(구한말 군령부총장을 지낸 막내 숙부 현영원은 일제 밀정 배정자의 두 번째 남편이었고, 겹사돈인 윤치호·윤치오 등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다.) 그 오욕이 만연한 시대에 빙허는 단 한 번도 친일에 발을 담그지 않았다. 1932년 셋째 형 정건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반년 만에 옥사하자 형수인 윤덕경도 형을 따라 자살한 뒤 크나큰 상실감으로 한동안 절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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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 시인

1939년 동아일보 학예부장으로 복귀해'무영탑' '적도' 등을 연재하여 단행본도 내지만, 죽은 형 정건을 기리기 위해 연재하던 마지막 미완성작 '흑치상지'가 일제 총독부의 검열과 탄압으로 불과 58회 만에 강제 중단되었고, 이어 그의 작품집인 '조선의 얼골'까지 총독부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어 판매가 금지된다. 그 화병으로 폭음하다 결국 장결핵으로 1943년 4월23일 사망한다. 무남독녀 화수를 월탄 박종화의 장남에게 시집보낸 지 한 달만이었고, 그 혼인을 주선하고도 위암이 악화되어 혼례에 참석 못 한 죽마고우 이상화가 사망한 한날이었다.

빙허의 유언에 따라 화장해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서장리에 매장되었으나 그 후 남서울 개발관계로 묘소가 사라져 유해는 한강에 뿌려졌다. 1년 후 그의 아버지 현경운이 대구에서, 아내 이순득도 친정에서 사망했다. 2005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 추서, 2009년 빙허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현진건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현재 대구 두류공원에 동고동락한 고향의 죽마고우 이상화, 이장희, 백기만과 그의 시비가 서 있다.

박미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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