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영남일보 문학상] 단편소설 당선작 - 최원섭 '수달' (상)

  • 노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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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1-01 08:18  |  수정 2021-01-01 08:32  |  발행일 2021-01-01 제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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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춘모 作

욕조의 물이 출렁였다. 그는 누워서 허연 천장을 바라봤다. 코로 물이 들어와서 머리를 쳐들었다. 양쪽 어깨와 무릎이 물 위로 솟아났다. 무릎 주변의 털들이 피부에 무질서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욕조 바닥에 등을 붙여 봐도 몸 전체가 잠기지는 않았다. 상체를 일으키자 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들리는 건 오직 물소리였다. 이 또한 층간소음이 될 수 있을까. 지나치게 세상이 조용했다.

밤새 잠을 못 자고 뒤척이던 그는 욕조에서 잠수를 시도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전체 빼기 남은 시간. 이 계산이 가능하다면 지나온 시간을 알 수 있겠지. 전체라는 시간은 과연 얼마나 주어진 것일까.

그는 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으며 거실로 나왔다. 서랍에서 팬티를 찾다가 바닥에 물자국을 남겼다. 겨우 찾은 팬티는 고무줄이 늘어져 있었다. 다른 것으로 바꾸려다가 그만뒀다. 마찬가지지. 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언제부턴가 그는 혼잣말을 했다. 혼자 웃기도 하고 끄응 소리를 내기도 했다. 잠도 혼자 잤고 밥도 혼자 먹었고 자위도 혼자 했다. 혼자 안 하는 게 있을까. 전체 빼기 혼자 안 하는 거. 제로.

역시 잠이 안 왔다. 욕실에서나 거실에서나 그는 천장을 봤다. 천장은 생긴 것과는 달리 무료하지 않았다. 네모난 평면을 주시하다 보면 별의별 영상들이 눈앞에 그려지곤 했다. 시간을 보내기는 안성맞춤이지만 허송세월과 다름없었다. 아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아들 옆에 나란히 배치했다. 둘을 감싼 배경은 전 세계 방방곡곡의 명소였다. 아들과 못 가본 데가 이렇게 많다니. 조금이라도 배경이 못마땅하면 마음에 들 때까지 바꾸느라 그는 온종일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빗소리가 들려왔다. 더위는 좀 가셨지만 대신 빛이 줄어들었다. 새벽인지 아침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내심 오후로 접어들기를 바랐다. 오전에 뭘 먹을지 고민을 덜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뭘 먹어도 상관이 없었기에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빗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는 영상이 나타나길 기대하고 있었지만 어디선가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따가닥. 딱. 딱. 따각.

불규칙하고 거친 소리였다. 그는 눈을 껌벅였다. 몸을 일으켜 소리의 근원을 찾아 나서기가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소리라면 누구든 거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혼자서 하는 일에 예외가 있었던가. 그는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보았다. 베란다에 뭔가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베란다 방충망이었다. 벌레이기에는 덩치가 컸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결과적으로 다행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희망으로 한 발 한 발 베란다를 향해 갔다. 열다섯 평 아파트라서 엎드리면 코 닿을 위치였다. 어둠이 채 걷히지 않아 미확인 존재는 타원형 윤곽만 드러냈다. 거북이를 뒤집어 놓은 꼴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큰 쥐일 수도 있었다. 꼬리가 보였기 때문이다. 화가 나서 누군가에게 욕을 퍼붓고 싶었다. 도대체 방충망에 왜 벌레 말고 다른 게 붙어 있느냔 말이다.

타원형이 움직였다. 네 발의 발톱들이 방충망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더 방치했다가는 방충망을 뜯고 집 안으로 들어올 태세였다. 그는 방충망을 소심하게 툭 쳤다. 엉덩이를 뒤로 쑥 뺀 자세였다. 타원형은 방충망에서 살짝 떨어졌다가 요요처럼 다시 붙었다. 탄력적이었다. 재차 공격에 나섰지만 성과는 미미했고, 오히려 상대가 즐기고 있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작전의 변화가 요구됐다. 그는 대항할 무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거실은 주방이자 유일한 방이기도 했다. 우선 싱크대에 달린 서랍을 열었다. 방충망을 통과할 만한 쇠젓가락 대신 나무젓가락만 가득했다. 어렵게 찾아낸 쇠젓가락을 들고 그는 베란다에 우뚝 섰다. 이를 악물고 징그러운 타원형을 푹 찔렀다. 손끝에서 뭔가 꿈틀하는 느낌이 전해졌다. 동시에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타원형은 방충망을 발톱으로 긁으며 아래로 미끄러졌다. 방충망이 아주 보기 좋게 찢어졌다.

쥐가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목격했다. 동그란 얼굴에 귀가 작았다. 뉴스나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었다. 수달이었다. 낙하할 때 서로 눈이 마주쳐서 잔상이 오래 갔다. 그 눈은 마치 입처럼 의사 표시를 하고 있었다.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운, 등의 평범한 감정 표현이 아니었다. '왜'였다. 왜 자기를 찌르는지 왜 자기가 찔려야 하는지. 실존적인 표현에 가까웠다. 그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왜, 같은 실존은 정작 그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는 다시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뒤척였다. 빗물에 젖은 수달이 천장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그는 일어나 옷을 대충 걸치고는 집을 나섰다. 복도로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중얼거렸다. 동물이야. 한낱 동물. 스스로 위안을 얻으려는 의도였지만 쉽게 마음이 달래지지는 않았다. 집에 침입한 도둑을 때리면 상해죄가 된다는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동물이 도둑으로 인정받을 수 있나. 정황상 정당방위였어. 최소한 야생동물을 상대하는 인간에게는 핸디캡을 줘야지.

경비는 앉은 채로 자고 있었다. 밖은 부슬비가 내렸고 어둠이 조금 남아있었다. 그는 집이 수직으로 울려다 보이는 지점으로 가기 위해 화단을 넘었다. 오층에서 떨어져도 살아날 수 있을까. 고양이라면. 예상지점에서 위를 보는데 빗물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비비다가 화단 한쪽에 꺾여 있는 상추 잎들을 발견했다. 잎사귀를 젖혀보니 수달이 누워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는데 빗물 때문인지 죽음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손을 넓게 펴서 비를 막았다. 수달의 작은 얼굴이 비를 피할 수 있도록. 그 덕분인지 수달이 눈을 떴다. 구슬 모양의 또랑또랑한 눈이었고 긴 수염들이 얼굴에 붙어있었다. 눈만 떴을 뿐이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계획을 갖고 나선 게 아니라서 머뭇머뭇했다. 괜찮으냐는 말도 건넬 수 없었고 119에 전화를 걸어 현 상황을 설명할 자신도 없었다. 수달은 무슨 영문인지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는 수달의 시선을 피해 먼 산을 바라봤다. 곧 아침이 올 기세여서 왠지 초조해졌다.

움직임이 없는 수달의 자세는 말 그대로 자포자기였다. 그는 수달을 끌어안을 작정으로 몸을 굽혔다. 팔이 닿을 즈음, 수달이 스스로 일어났다. 한잠 자다가 이부자리를 빠져나오는 노인 같았다. 그는 땅에 발을 디딘 수달의 모습이 왠지 어색했다. 직립이었다. 두 발로 선 키가 그의 무릎 정도였다. 수달이 그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너무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그는 엉겁결에 그 손을 잡았다.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그는 누가 볼까봐 서둘러 수달의 팔을 잡아당겼다.

집에 들어서자 수달이 우두커니 섰다. 거실바닥에 물이 흥건해졌다. 온몸을 덮은 수달의 털이 물에 젖어 반짝였다. 손님인 양 예의를 차리는 수달의 모습에 그는 들어오세요, 라고 말할 뻔했다. 그가 수달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유도했지만 발바닥을 떼지 않았다. 더 기가 막힌 건 그를 보는 수달의 눈이었다. 몸이 젖었잖아, 라고 말하고 있었다. 별 수 없이 그는 수건을 대령해야 했다. 그는 거실 구석에 있는 걸레를 집었다가 도로 내려놨다.

수달이 손발을 꼼짝하지 않아 그는 몸종 신세나 다름없었다. 그는 수건으로 손수 수달의 몸뚱이를 닦아줬다. 수달의 털은 보통 개의 것보다 굵고 꼿꼿했지만 부드러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온몸이 흠뻑 젖어 수건 하나로 모자랄 지경이었다. 배를 닦을 때는 움찔했고 머리를 닦을 때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인간을 흉내 내는 건지 본능인지 알 수 없었다. 다리는 짧아서 눈 깜짝할 사이에 닦아냈다. 집에 남아있는 마른 수건들을 소진하고 나서야 그 물기를 다 없앨 수 있었다. 고생스럽기보다는 왠지 모를 성취감이 들었다. 드라이어까지 동원해 수달의 털을 뽀송뽀송하게 마무리해 주었다. 수달은 내내 미용실에 온 손님 같은 태도였지만 그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았다. 도리어 둘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날리는 데 일조를 했다.

수달은 걸을 때, 별일이 없는 한 네 발이었다. 크지도 않은 공간을 휙 둘러본 수달은 욕실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그를 돌아봤다. 무슨 조화인지 그는 말 못하는 수달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런 자신의 정체가 의심스러워서 그는 벽에 걸린 거울에 자기 얼굴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그는 수달이 원하는 대로 욕실 문을 열어줬다. 수달은 욕실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젖은 바닥과 물기가 남은 욕조를 살피더니 그에게 대뜸 눈으로 말했다.

여기네. 여기서 나를 불렀지?

그는 깜짝 놀랐다. 욕조에는 있었지만 누구를 부른 기억은 없었다.

노래를 더럽게 못하더군.

난 노래를 부른 적 없어. 가만히 누워있었어.

물에서는 생각조차 파동을 만들지. 아주 답답한 노래였어. 그냥 지나칠 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오층까지 올라왔다고?

내 몸은 엿가락처럼 늘어나. 베란다에서 베란다를 오르내리는 건 식은 죽 먹기지. 바다로 가다가 길을 잃었어. 끔찍한 터널과 하수구를 헤매다가 겨우 지상으로 올라왔건만.

그는 순간 대화를 피하고 싶어졌다. 수달이 배를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불의의 테러를 당한 부위가 쓰리구나. 쓰려.

그는 수달의 행동을 잠자코 지켜봤다. 상해죄로 걸고넘어질 심산은 아닌 듯 했다. 그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사후 조치 정도는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책이 없었다. 그의 집에 비상약품이 구비됐을 리가 만무했다. 약이라고는 수면제가 전부였고 수달을 애써 잠재울 구실도 없었다.

해가 뜨고 거실이 점점 밝아졌다. 수달은 침대 밑으로 가서 엎드렸다. 길게 처진 몸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에 그는 마땅히 앉을 자리를 찾지 못했다. 혼자 있다면야 당연히 침대 위로 갔겠지만 막상 손님의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었다. 그도 침대에 기대앉았다. 다들 출근을 했는지 이웃들은 기척이 없었다. 집 안의 고요함은 곧 서먹함으로 바뀌었다.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었지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손님 대접의 필요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가 냉장고를 열고 우유를 꺼냈다. 유통기한은 지났지만, 냄새는 괜찮았다. 그는 납작한 접시를 찾다가 펄쩍 뛰었다. 바로 옆에 수달이 와서 서 있었다. 그냥 줘. 입 대고 마시게. 그는 미심쩍은 얼굴로 우유팩을 건넸다. 수달은 두 손으로 우유팩을 받더니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수달의 손가락이 다섯 개여서 의외였다. 야무진 손아귀와 손톱 덕분에 팩을 놓치지 않았다. 수달은 우유를 많이 마셨다. 그는 자신의 배까지 부른 착각이 들었다. 수달의 주둥이가 점점 하얗게 변해갔다.

수달은 우유를 다 마시고 나서도 만족하지 못했다. 텅 빈 냉장고의 문을 닫지 못하고 미련을 가졌다. 대식가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냉장고 문을 닫으려고 수달의 팔을 당겼다. 수달은 냉장고 문을 붙잡고 버티다가 힘에 부친 듯했다. 배가 고프다는 팬터마임의 일환으로 배를 쑥 집어넣고는 스스로 놀라는 시늉을 했다. 젓가락에 찔린 듯한 부위가 부어올라 있어서 그에게 죄책감을 상기시켰다.

멋쩍어진 그가 두리번거리다가 구석에서 스펀지 미니 공을 집었다. 수달의 관심을 식욕에서 멀어지게 할 작정이었다. 옛날에 아들에게 그랬듯이 공을 큰 포물선 형태로 던졌다. 수달을 향해 날아가는 공에서 먼지가 일었다. 수달은 공을 손바닥으로 무관심하게 쳐냈다. 놀이의 룰을 모르는 것 같아 그가 다시 공을 던졌지만 수달의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공을 쳐내는 강도만 세졌을 따름이었다. 그가 공을 계속 던졌다가는 서로 다툼으로 번질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수달의 식욕을 잠재우기에도 역부족이었다.

그는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수달은 거실에 눈을 감고 엎드렸다. 수달을 데리고 나갈 방도가 없어서 그는 혼자 나섰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그에게는 꽤 희생을 감수하는 결정이었다. 천성적으로 길눈까지 어두운 그였다. 마트로 갈까 하다가 수산시장으로 목적지를 잡았다.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고서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모든 게 오랜만이었지만 목표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오래전에 그는 목적지도 없이 떠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아들이 실종된 후였다. 종점에서 종점으로 종착역에서 종착역으로 오간 적이 부지기수였다. 기차도 탔고 배도 탔고 버스도 탔다. 아들이 물에 빠져 떠내려간 해변에도 여러 번 갔다. 하지만 해가 바뀔수록 그 횟수는 줄어들었고 그의 외출은 흐지부지 끝이 났다. 그 후 그는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특히 욕실로 들어가면 욕조 안에 오랫동안 머물러서 아내를 긴장시켰다. 더구나 아내는 물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아내는 그를 욕실에 못 들어가게 말렸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하루는 아내가 말도 없이 집을 나갔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아내를 기다리다 혼자 이사를 했고 줄곧 집에 틀어박혔다.

그에게 수산시장은 오랜만이 아니라 처음이었다. 상인들이 시장 통로 양쪽에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다들 말소리가 크고 빨라서 그는 금방 위축됐고 신경이 곤두섰다. 수산시장보다는 인간시장에 가까웠다. 목소리가 걸걸한 상인이 그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조기. 고등어. 삼치. 대구. 장어. 상인은 가게에 없는 생선이 없다면서 무슨 요리를 준비하는지 물었다. 요리씩이나. 그는 상인이 열거한 생선을 종류별로 한 마리씩 샀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는 근처 약국에 들렀다. 소독약과 반창고를 샀다. 텔레비전에 동물원에서 탈출한 수달에 관한 뉴스가 나왔다. 먼 태평양을 건너온 귀하신 몸이니 목격자는 즉시 신고를 바란다고 했다. 약국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아파트 건물로 들어오면서 그는 경비와 마주쳤다. 경비의 자세가 하도 뻣뻣해서 그는 시선을 피했다.

그가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수달은 현관에 마중 나와 있었다. 수달은 그를 보는 둥 마는 둥하며 그가 든 봉투에 고개를 처박았다. 사정없이 봉투를 뒤적이는 바람에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예상과 달리 수달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빼냈다. 영문을 모르는 그는 수달이 다시 거실에 엎드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봉투째 냉장고에 넣고 나서 수달 옆으로 갔다. 토라진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수달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수심 어린 얼굴로 수달을 달랬다. 수달을 돌아 눕히고 배에 약과 반창고를 처방하려 했지만 그마저 거부당했다. 수달이 그의 팔을 뿌리칠 때는 살갗을 약간 긁히는 수모를 겪었다. 마침내 수달은 벌떡 일어나더니 자기 배를 가리켰다. 이건 상처가 아니야. 배꼽이야. 넌 나에 대해서 너무도 몰라. 수달의 선언은 그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는 수달 옆에 엎드려 휴대폰 검색을 시도했다. 수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돌입했다. 기본적으로 수달은 하루의 반 이상을 먹이사냥에 투자했다. 한낮에 잠을 자고 나머지 시간은 먹는 게 일이었다. 전생에 덕을 쌓았는지, 일부다처제였다. 강에 사는 수달과 바다에 사는 수달은 먹이부터가 달랐다. 서식지가 다르니 습성과 생태도 특징이 있었다. 바다 수달은 배영에 능했고 곁에 있는 수달이 떠내려가지 않게 손을 잡아준다고도 했다.

축 늘어져 있던 수달이 슬며시 한쪽 눈을 떴다. 그도 수달을 보고 있던 차라 서로 눈이 마주쳤다. 어쩔 수 없이 두 눈을 다 뜬 수달이 말했다.

이제 내가 뭘 먹는지 알았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달은 당연하다는 듯 목을 곧게 펴서 콧대를 세웠다. 그는 꼴사나운 수달에게 한마디 건넸다.

그것만 안 건 아니지.

수달의 귀가 쫑긋해졌다.

도망자더군. 유명한.

수달은 당황하지 않고 그를 주시했다. 예상이라도 한 듯이 반문했다.

그래서 어쩔 작정이야? 나를 여기서 내보내겠다는 건가? 신고라도 하게?

나는 혼자 사는 체질이야. 늦은 나이에 깨달았지만.

난 돌아가기 싫어.

이 집에서도 살 수 없잖아. 생태계가 다르니까.

그래. 난 원래 캘리포니아 몬터레이 베이에서 왔어. 나를 좋다고 쫓아다니는 바다사자를 피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 종이 다르고 심지어 수놈이야. 펭귄을 강간했다는 소문도 파다했지. 여기는 그놈들이 없어서 천만다행이야.

동물원은 어쩌다 간 거야?

억울하게 잡혔어. 길눈이 어두워서 어쩌다 간 곳이 바다와 강이 만나는 근처였지. 그런 데가 놀기는 좋거든. 낚시금지 사인이 있어서 안심했는데.

글자도 보는군.

난 머리가 좋아. 하지만 글자는 아니고 그림이었어.

여기서는 아무도 믿지 마.

바다로 갈 거야. 동물원 우리 안에 탈출구를 만들어놨지. 그런데 막상 출발해보니 너무 미로야. 힘들게 구멍을 파놨는데. 봐봐. 내 이빨.

앞니가 보통 아니네.

하수구에 닿을 때까지 갉아댔어. 이가 좀 닳았을 거야.

수달이 앞니를 내밀어 자랑하는 걸 보며 그는 다시 외출에 나섰다. 이번에는 가까운 마트로 갔다. 그는 마트의 수산물 코너로 직행해서 조개를 다량으로 구입했다. 직원이 도매는 마트보다 수산시장이 싸다고 귀띔했다. 그가 양손에 든 봉지와 등에 맨 배낭은 조개로 가득 찼다.

경비실에서 그를 발견한 경비가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코를 벌름거리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해산물을 좋아하시나 봐요. 배낭도 꾹꾹 눌러보며 놀라워했다. 그는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엘리베이터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수달이 조개를 보자 꼬리를 흔들며 달려들었다. 거실은 금세 조개판으로 변했다. 수달은 정해진 식사 예절이 없었다. 손가락으로 조개껍질을 까기도 하고 배에 올려놓고 주먹으로 내려치기도 했다. 성치 않은 이빨까지 동원하는 바람에 옆에서 구경만 하던 그는 싱크대 서랍을 뒤적였다. 칼을 가져와서 조개껍질 틈을 벌려줬다. 덕분에 수달은 편하게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는 조개껍질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다가 현관에 쌓아 뒀다. 수달은 배를 두드리며 만족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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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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