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정홍래 '해응영일(海鷹迎日)'

  • 유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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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1-15   |  발행일 2021-01-15 제37면   |  수정 2021-01-15
거친 파도 속에서 일출 맞이하는 매처럼…용맹한 한 해 염원

정홍래
정홍래 '해응영일', 비단에 채색, 116.5×63.3㎝, 간송미술관 소장.

긴 기다림 끝에 맞이하는 일출은 언제보아도 장관이다. 동해에서 만난 새해의 일출 광경은 경이로웠다. 일출을 보러 온가족이 밤길을 달려간 보람이 있었다. 우리는 진한 해의 열기를 품은 채 한 해를 났다. 그 기운이 소진될 쯤 불씨를 갈듯이 해맞이에 나섰다.

이제는 일출을 아파트에서 본다. 신축년(辛丑年) 새해도 소파에 앉아서 맞이했다. 동해에서 긴장하며 보던 일출의 생동감은 없지만 그래도 신선하다. 만향(晩香) 정홍래(鄭弘來, 1720~?)의 '해응영일(海鷹迎日)' 같은 붉은 기운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해응영일'은 바다에서 매가 해를 맞이한다는 뜻이다. 파도의 실루엣 위로 붉은 해가 얼굴을 내밀며 솟아오르고, 그 앞에 홀로 선 매의 자태가 당당하다.

매는 강하고 힘센 날개와 날카로운 발톱, 부리를 가진 일등 사냥꾼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말을 탄 사람의 팔 위에 매가 묘사돼 있어 매의 오랜 사냥 실력을 입증한다. 매를 뜻하는 한자인 '응(鷹)'은 영웅(英雄)의 영(英)자와 중국 발음이 같아서 영웅으로 상징된다. 의로운 통치자를 지칭하는 천신(天神), 용맹, 충신 등의 상징성 때문에 오래전부터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특급 소재였다. 또 영물로서 액막이용 부적으로도 사용되었다.

조선 후기 매 그림으로 유명한 정홍래는 초상화, 영모화, 화조화 등에 능한 도화서 화원이었다. 벼슬은 내시교수(內侍敎授)였고, 담암(澹庵) 장우규(張友奎)가 '교수정홍래유거(敎授鄭弘來幽居)'에 대하여 '거문고와 책이 깨끗한 들사람(野人) 집에 깊고 깊은 골짜기에 늦은 안개가 비쳤구나'라는 글을 썼다. 작품처럼 맑은 인품을 짐작할 수 있다. 1748년(영조 24) 숙종 어진모사에 참여했으며, 1755년에는 영조의 회갑을 축하하는 장면을 그린 '기로경회첩'을 제작하는데 참여했다. 매 그림으로는 '해응영일'과 유사한 구도의 작품 5점이 전한다.

매 그림은 중국회화와 화보(각종 기법과 모범이 될 만한 그림을 실어놓은 책)가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조선 후기에 유행했다. 정홍래의 바다를 배경으로 한 매 그림은 중국의 문헌자료에서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조(潮, 바다)'는 '조(朝, 조정)'와 발음이 같기에 바다는 궁궐·왕실을 의미하는 단어로 해석된다. 바다를 바라보며 바위에 서 있는 매 그림은 '청조독립(淸潮獨立)'의 뜻이 담겨 있다. 청조독립은 '청렴한 마음가짐으로 조정에 홀로 선다'는 교훈적인 의미를 지닌다. '해응영일'은 왕실에서 나라를 위해 힘쓴 관료들에게 새해의 메시지를 담아서 세화(歲畵)로 전한 듯하다.

이 작품은 수려한 자태의 매가 바위에 앉은 채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화면 바깥을 응시하고 있다. 붉은 기운이 가득한 하늘에는 둥근 해가 뜨겁게 솟아오른다. 굽이치는 물결 너머에는 안개가 자욱해 상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화면 앞에는 파도가 포말을 일으키며 바위에서 부서진다.

영지버섯 모양의 흰 포말이 짙은 갈색의 바위를 돋보이게 한다. 검은 먹 선으로 높은 파도를 그리고, 그 속에 작은 파도를 가는 선으로 세밀하게 그려서 파도를 강조했다. 세로로 우뚝 솟은 바위에 짙푸른 녹색의 태점을 찍어 신령스러움을 더했다. 바위에 착지한 매의 발톱이 날카롭다. 단단한 부리와 검은 눈동자가 날렵하고 매섭다. 회색계열의 깃을 가지런히 표현해 윤기가 흐른다. 꼬리 깃은 짙은 먹으로 길게 마무리했다. 흰색에 갈색 무늬를 그린 목덜미와 다리는 검은 깃과 대비를 이룬다. 원경에는 높이 솟은 파도 사이로 붉은 해가 하늘을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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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응영일'에는 바다와 해, 바위와 파도, 장식성이 강한 바위의 태점 등이 음양의 원리를 구현하며 궁중장식회화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궁중회화의 대표작인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에 보이는 왕실의 안위와 근엄성이 이 작품에도 스며있다. 매의 묘사기법이나 형태는 조선 초기 두성령(杜城令) 이암(李巖, 1507~1566)의 '가응도(架鷹圖)'의 작품을 이어받았다. 매 그림은 정홍래만의 기법으로, 장식적인 형상과 진채를 사용했지만 점차 후기로 갈수록 문인적인 취향으로 변화되었다.

오늘도 치자색으로 곱게 물든 하늘에는 붉은 빛이 찬란하다. 코로나19로 동해의 일출 명소가 폐쇄되고 행사도 취소되었지만 '해응영일'의 일출을 보면서 매처럼 용맹한 한 해가 되길 기원한다.
화가 2572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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