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푸른여인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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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3-09  |  수정 2021-03-09 07:47  |  발행일 2021-03-09 제15면

이윤경
이윤경〈아동문학가〉

최근에 시내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하고 나니 좋은 점 중 하나가 아파트에서 가까운 곳에 꽃시장이 있다는 거다. 도매시장이라 싱싱하고, 값싸고 꽃의 종류도 다양해서 구경도 할 겸 자주 들른다. 이른 아침 시간에 운동 삼아 걷다가 노란 프리지어나 리시안서스, 비단향꽃무 같은 향이 좋은 꽃을 몇 다발 사서 집안 곳곳에 꽂아놓는다.

이사도 한 김에 인테리어 잡지에 나오는 집들처럼 거실에 키가 크고 잎이 널따란 큰 화분을 들이고 싶어 이곳저곳 돌아보다가 날씬하고 큰 키에다 윤기 나는 진초록 줄기에 시원스레 넓은 잎을 드리운 식물을 보았다. 파초를 닮기도 했고 극락조 같기도 한데, 생김새가 조금 달라 보여 물어보니 "여인초"라고 했다.

여인(女人)이 아니고 여인(旅人), 여인(女人)이든 여인(旅人)이든 쭉쭉 뻗은 생김새와 강인해 보이는 진녹색과도 퍽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파초과(芭蕉科) 교목으로 원산지는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의 고산지대다. 잎과 줄기에 물을 저장해두어 목마른 여행자들이 갈증을 없앨 때 요긴하게 쓰는 식물이라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이 매력적인 여인에게 끌리어 어울릴 만한 커다란 화분에 심어 집에 데리고 왔다. 반그늘에 자리를 잡아 물을 듬뿍 주고, 잎을 닦아주고, 가끔 창을 열어 바람을 쐬주었다. 며칠이 지나자 밑동에서 뾰족하게 돌돌 말린 새잎이 올라오더니 이내 부채처럼 펼쳐진다. 새잎은 연한 초록인데, 새로 난 잎이 제일 넓고 크다.

코로나로 인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사람과의 만남과 관계유지에 쓰던 시간과 정성을 집안에 있는 소홀했던 식물들에게 쏟는다. 바라보고 닦아주고 손길을 눈길을 자주 보내니, 이내 싹을 올리고, 저마다 꽃을 피우고, 자라고 무성해진다.

어린 시절 고향집 꽃밭에는 어른 키보다도 훨씬 큰 파초가 있었다. 그 이국적인 넓은 잎 아래서 나는 지도책을 들여다보며 열대지역 나라들을 여행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서리가 내릴 즈음이면 밑동을 베어내고 짚을 덮어 뿌리가 얼지 않게 월동을 시켰다. 다음 해도 그다음 해도 파초는 무성했다. 그 기억 속 파초의 사촌쯤 되는 여인초를 곁에 두고, 코로나19 시대 지금은 갈 수 없는 먼 나라로의 여행을 꿈꾼다. 그러면 푸른 잎을 넓게 드리운 여인초(旅人蕉)는 기꺼이 마다가스카르의 고산지대로 나를 데리고 간다.
이윤경〈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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