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양달석 '소와 목동'

  • 김남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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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5-07   |  발행일 2021-05-07 제37면   |  수정 2021-05-07 09:08
싱그러운 어린시절의 기억…행복은 가족의 울타리에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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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달석 '소와 목동' 종이에 수채, 1970년

5월에는 꽃보다 초록이 더 예쁘다. 산빛은 연둣빛 합창으로 설렌다. 집 근처에 있는 천을산을 밟는다. 초록으로 갈아입은 숲이 엄마의 품속처럼 아늑하다. 주인의 손길이 가득한 텃밭을 지나니 살구가 제법 영글었다. 연못에는 오리 한 쌍이 물살을 가른다. 싱그러운 풍경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세상이 한 폭의 그림이다.

화가들은 자연에서 소재를 찾고 자기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한다. 서양화가 양달석(1908~1984)도 그랬다. 자연을 대상으로 소와 아이가 주인공인, 자신의 이야기와 생각을 담았다. 그의 '소와 목동'은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진 상쾌한 작품이다.

샛노란 유채꽃이 핀 들판에 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는다. 연초록 풀을 배경으로 퉁소를 불며 노는 아이들이 있고, 드넓은 강이 마을 어귀를 휘돌아 흐른다. 그 옆에 초가가 단아하다. 하늘에는 구름이 흐른다. 목가적인 정경이다.

화가에게는 저마다 행복을 상징하는 그림이 있다. 내가 어린 시절에 그리곤 했던 행복한 풍경은 바닷가에 배가 한 척 있고, 절벽에 휘어진 소나무가 있는 그림이었다. 양달석은 유독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순간에 주목했다. 불운한 시대의 아픔과 절망을 그만의 행복으로 풀어낸 것이다.

경남 거제에서 태어난 양달석은 9세에 한의사인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 집에서 소를 키우며 더부살이를 했다. 사방이 막힌 어둠 속 같았던 그에게 한줄기 빛은 그림이었다. 누이의 도움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그림대회에서 여러 번 입상하여 재능을 인정받았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하고 도쿄로 건너간다.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지만 생활고로 학업을 중단하고 부산에 정착한다.

양달석의 그림이 향한 곳은 아버지의 품에서 행복에 젖었던 어린 시절이다. 그 시절의 행복한 기억이 그의 낙원이자 꿈이었다. 그는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아름답고 환상적인 산과 나무, 집, 아이, 소 등으로 승화시켰다. 우직한 소는 언제나 그의 친구였으며 평생의 동반자였다. 퉁소를 부는 아이는 꿈을 노래하는 그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미술평론가 김강석(1932~1975)은 "그의 정신적 현실에는 관념에 의하여 만들어진 아름다운 환상뿐이다. 전쟁과 빈곤, 부조리와 기아에 시달린 참혹한 현실이 그의 그림에는 없다"고 평했다.

'소와 목동'은 고향의 향수를 젖게 한다. 유유히 흐르는 강에 놓인 다리에는 산에서 나무를 하고 돌아온 후 지게를 옆에 내려놓고 쉬는 아이, 낚시를 하는 아이, 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가 있다. 강가에는 노랗게 핀 유채꽃이 화사하다. 기름진 들판에 한가로이 풀을 뜯는 두 마리의 소가 있다. 퉁소를 부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앉아서 퉁소 소리를 감상하는 아이가 있다. 초가지붕에는 호박 넝쿨이 뻗어 있다.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싸리문 사이로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초가지붕 뒤로 나무가 숲을 이룬다. 하늘에는 한 조각의 구름이 흘러간다.

이 작품은 담채화다. 스케치한 연필선을 살리면서 수채물감으로 엷게 채색했다. 덕분에 초록이 번지기 시작하는 초봄의 풍경 같다. 연초록의 이파리가 산뜻하다. 노란색 꽃은 농촌 어디서나 흐드러지게 피어 봄을 상징한다. 강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그림자가 물결 위에 떠 있어 더없이 한가하다. 인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았지만 천진한 아이들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농촌의 상징인 소는 자유롭다. 편안하고 싱그러운 양달석만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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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달석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광복과 6·25전쟁을 겪었다. 일찍 부모를 여윈 그는 평생 그림과 함께 살았다. 말년에는 긴 투병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붓을 들었다. 그림이 희망이자 삶의 이유였다. 그는 힘든 생활에도 그림으로 행복을 만들었다. 그림 속의 아이처럼 소와 함께 행복을 일궜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짧았던 어린 시절은 무한한 행복의 원천이었다.

가족의 따스함을 생각하는 5월이다. 서운함이 있어도 애틋한 것이 가족이다. 행복은 가족의 울타리에서 피어난다. 살다보면 저마다의 행복을 만드는 방식이 있다. 나에게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동생들이 행복의 배달부다. 동생은 맛있는 음식을 해서 현관문 앞에 두고 간다. 코로나가 만든 일상이지만 작은 배려가 마음을 데운다. 행복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김남희 화가 2572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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