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3> 이하석의 ‘털네의 밤 손님’

  • 입력 2021-05-25 14:04  |  수정 2021-05-31 13:40
- 선산 도리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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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경의 밤은 늘 불안하다. 오늘처럼 가을바람이 스산하게 부는 날은 더하다. 고구려 땅인 산등성이에서 초저녁부터 고라니가 울더니, 그 그릇 깨지는 듯한 소리가 신라 땅인 냉산 등성이 쪽으로 넘어오곤 한다. 털네(毛禮)는 자주 마당에 나가 고라니 울음이 넘어오는 산을 올려다본다. 캄캄하다. 이런 어둠과 정적은 국경을 넘는 이에겐 아주 좋은 여건이 되리라. 털네는 또 가슴이 조인다. 국경을 넘어와 그의 집을 찾을 이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이 오래전부터 일과가 되어버렸다.


얼굴이 검은 그 사내. 그 때도 이런 정적 속을 더듬어 그가 왔다. 조용히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안채는 물론 바깥채의 일군들도 잠든 한밤중. 양들이 자는 우리 안도 조용했다. 이따금 소 우리에서 소들이 내뿜는 콧김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일군 중의 한 사람이려니 생각했다. 국경지역의 밤손님은 언제나 경계대상이라, 밤에 나다니는 이는 잘 없기 때문이었다. 문을 열자 어둠 속에 괴이한 모습의 누가 서 있었다.
 

“누, 누구요?”
 

“쉿!”
 

그가 재빨리 방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털네에게 절부터 했다. 그가 불빛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이했다. 박박 깎은 머리에 얼굴은 검고, 장삼을 입고 있었다. 털네도 털보라는 별명처럼 얼굴이 수염투성이라 검었다. 그는 피부가 검었다. 눈만이 반짝였다. 의외로 준수한 용모였다. 털네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국경을 넘어왔습니다. 묵호자로 불리지요. 고구려 사람입니다. 어르신의 존함을 익히 들어 알고 찾아왔습니다.”
 

“차림은 스님 같소만.”
 

“그렇습니다. 당분간 좀 숨겨주십시오.”
 

고구려와 백제에는 이미 절이 세워져 불교를 믿는 이가 늘어난다고 했다.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신라는 아직 그렇지 못했다. 왕실의 공인이 없어 불교는 위험한 사상이었고, 승려는 배척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정당한 입국이 아닌, 밀입국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걸리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털네는 그를 숨겨주는 게 운명이라 여겼을까? 그 때부터 묵호자는 그의 집 깊숙한 곳에 숨은 채 머슴처럼, 엄청나게 많은 양과 소를 먹이는 목동처럼 행세하면서 밤에 인근 사람들을 모아 은밀하게 포교를 했다. 어느 날 서라벌에서 사람들이 내려와 기이한 물건을 내놓으며, 그 쓰임새를 묻고 다녔다. 양나라에서 온 물건들 중 불상과 불경은 알겠는데, 명단(溟檀)이 뭔지 몰라 조정에서 그 쓰임새를 수소문하고 다녔던 게다. 불교를 모르는 상태라 아무도 알 리 없었다. 그러나 묵호자가 알았다. 피우는 향이라 알려주었다. 이를 계기로 서라벌로 가서 왕녀를 치료하여 왕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서라벌은 위험했다. 그는 다시 야음을 타서 털네집에 잠입했다가 행적을 감추어버렸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른 셈이다. 털네도 꽤 늙었다. 얼굴을 덮은 수염도 흰 빛이 많아졌다. 묵호자가 사라진 후 그 많은 세월동안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저녁이면 그를 기다렸다. 그런 일 역시 그의 운명이라 여겼을까?
 

밤이 깊다. 그는 불을 끄고 눕는다. 또 고라니가 운다.
 

벌레소리가 갑자기 뚝 끊긴다. 그는 벌떡 일어난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미세한 인기척 소리가 난 것이다. 가슴이 뛴다. 문을 열자 옛날 본 그 기이한 자태를 한 자들 네명이 서 있다. 털네는 재빨리 방으로 인도한다. 불을 켜자 그 중 한 사람이 절부터 한다. 이번에는 털네도 그에게 절을 한다. 그리고는 그를 바라본다. 역시 얼굴이 검다. 묵호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얼마나 긴 세월이 흘렀는데, 그 얼굴이 그대로일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는 아직 스무 살이 채 안된 앳된 모습이다.
 

“아도라고 합니다. 어르신의 존함을 오랜 예전부터 익히 들었는데, 이제야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시종들과 함께 왔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스님, 누추하지만 저의 집에 숨으십시오.”
 

그리하여 아도와 시종들 역시 머슴처럼, 양과 소를 키우는 목동처럼 털네 집에서 일하면서 밤마다 은밀하게 포교를 했다.

2
국경의 밤은 늘 불안하다. 털네는 오늘도 문밖을 한참이나 지켜보다가 방으로 들어온다. 아도를 기다리는 게다.


아도는 어머니의 말씀을 좇아 서라벌로 가서 불법을 펴는 걸 의무로 여겼다. 호시탐탐 서라벌 행을 노렸다. 그러나 불법의 전파는 요원했다. 승려의 모습도 괴이하게 여겨졌고, 그 사상도 위험시됐다. 승려를 죽이려는 세력도 만만찮았다. 그래도 아도는 수차 서라벌로 들어가 불교 전파를 역설했다. 그러다 공주가 병이 나 무당과 의원의 치료에도 차도가 없자, 아도가 그 치료를 자원, 대궐로 들어갈 기회를 얻었다. 아도의 극진한 치료와 기도에 공주의 병이 낫자 왕은 기뻐하며 소원을 물었다.
 

“천경림에 절을 세워 불교를 일으켜 나라의 복을 빌고 싶을 뿐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왕이 허락했다. 띠풀로 지붕을 해 절을 짓고 흥륜사라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왕이 죽자 불교 반대론자들의 득세가 심해지고, 아도를 해치려 했다.
 

털네는 그런 사정을 전해 듣고 있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아도가 다시 그의 집에 돌아오리라 여기고 기다린다. 불안하다. 그동안 고구려에서 몇몇 승려들이 신라로 들어왔다가 왕과 신하들의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한 일을 상기한다. 아도 역시 생명이 위험한 상태에서 무사히 서라벌을 빠져나왔는지 걱정이 된다. 밤공기가 차다. 털네는 다시 마당에 나와 대문의 빗장이 풀어져 있는지 확인한다. 아도가 오면 소리 없이 잘 들어올 수 있게 늘 그렇게 해놓았다.
 

잠깐 잠이 들었다가 인기척에 일어나보니 옆에 누가 앉아 있다. 벌떡 일어나자, 그가 조용히 말했다.
 

“접니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아도였다. 둘은 얼싸안았다.
 

“얼마나 걱정이 됐는지 모릅니다. 스님, 이렇게 오실 줄 알았습니다.”
 

“조정에서 나를 해치려드니, 이곳도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어르신도 위험할 수 있지요. 내일 냉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 피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디, 봐 둔 자리가 있습니까?”
 

“나중에 알려드리지요.”

3
국경의 밤은 늘 불안하다. 냉산 기슭에서 고라니가 운다. 사슴도 운다. 은밀한 곳을 즐기는 짐승들인데 저렇게 우는 걸 보니 새끼라도 낳았나보다 라고 털네는 생각한다. 아도 역시 저 산 어디에선가에서 입정에 들었을까? 털네는 금방이라도 그가 집으로 들어설 것 같아 가슴이 조마조마 한다.
 

아도가 냉산에 든 지 3년째에 냉산 남쪽 기슭에 절이 지어졌다. 띠를 엮어 덮은 작은 집이지만, 그것은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기적 같았다. 그러했다. 아도가 점지한 땅이었다. 겨울인데도 하얀 눈 속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어 있던 곳이었다. 생각이 간절하면 그런 일도 일어나는 법이다. 털네는 전 재산을 절 짓는 일에 쏟아부었다. 절이름은 도리사(桃李寺)라 했다. 그러나 아도는 여전히 위험한 수배인물의 상태였다. 냉산 북쪽 켠 토굴 속에 숨어 있어야 했다. 나중에는 아예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입적했다는 소문도 들렸다.
 

털네도 이젠 늙었다. 그에게는 오직 기다리는 일만 남았을 뿐이었다. 국경의 밤은 늘 고저넉하지만, 불안하다. 냉산 기슭에서 고라니가 운다. 이런 날 밤이면 누가 또 국경을 넘어올지 모른다. 아도가 냉산을 내려와 불현듯 그의 앞에 나타날 지도 모른다. 언젠가 아도는 털네에게 말했다.
 

“이 곳은 신라에서 불법의 꽃이 처음 핀 곳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성스럽고 영광스런 자리지요. 나중에 이 지역의 이름이 도계(道開)라 불릴 지도 모릅니다. 꽃을 피운 이는 소승이 아니라 어르신이라 해야 옳을 것입니다. 어르신의 이름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일 뿐”이라고 털네는 중얼거린다. 그는 새로운 생각과 사상이 들어오는 길목을 지키는 사람이므로 기다림을 운명적인 일이라 여겼을까? 기다리는 그에게 찾아온 것과 꽃 핀 것은 무엇일까? 다만, 그는 여전히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밤이 깊어지자 그는 또 우물이 있는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의 빗장을 가만히 열어놓는다.
이하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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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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