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경주 불상 세 점의 기구한 운명…대통령이 세 번 바뀌는 동안…엎어진 바위 하나 못 일으켰다

  •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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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0-01   |  발행일 2021-10-01 제35면   |  수정 2021-10-01 08:41
2불두
'노천박물관'으로 불리는 경주는 불교 유적의 보고다. 수많은 유적 가운데 상처받은 중생을 위로하고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것이 부처다. 2007년 5월 경주 남산 열암곡에서 엎어진 상태로 발견된 마애불의 얼굴 모습. 기적처럼 바위에서 불과 5㎝가량 떨어져 있어 손상을 입지 않았다.
'노천박물관'으로 불리는 경주는 불교 유적의 보고다. 수많은 유적 가운데 상처받은 중생을 위로하고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것이 부처인데 천년 불국토에 사연 많은 불상이 한두 점이겠느냐만 경주 불상 세 점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 남산 열암곡 마애불
앞으로 엎어진 상태로 2007년 발견
땅에서 5㎝…기적처럼 온전한 상태
세종 때 지진때문에 떨어졌다 추정
곧 일으킨다더니…14년째 제자리

2007년 5월 경주 남산의 남쪽 골짜기 열암곡에서 앞으로 넘어져 있는 마애불이 발견되었다. 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불두와 바위가 5㎝가량 떨어진 채 땅을 보고 40도 경사로 고꾸라져 있었다. 좁은 틈새 사이로 보이는 볼륨 있는 얼굴, 날카로운 눈매, 도톰한 입술은 매우 양호하여 '세기의 발견'이라면서 나라가 떠들썩했다. 프랑스 르몽드지도 '5㎝의 기적'이라며 대문짝만하게 기사화했다.

불상 크기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4.6m, 연화대좌 1m, 전체 5.6m 되는 거대한 마애불이다. 지진으로 불상이 새겨진 바위 덩어리가 앞으로 떨어졌는데 불두는 손상을 입지 아니한 것 같다. 8세기 후반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1430년 세종 때 경주에 큰 지진이 있었는데 그때 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뒤편 산등성이에 올라서니 본래 위치가 쉽게 추측되고 남쪽으로 일망무제 사바세계가 아스라이 펼쳐져 있다. 원자리 표시판이 있으면 더 좋겠다.

곧 일으켜 세울 듯 난리를 피우더니 발견된 지 14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바위 덩어리에 철망을 치고 검은 차양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10여 년 관리해 왔다. 작년에 축대를 쌓아 바닥을 넓히고 반영구적인 보호각을 세웠다. 당분간 이대로 둘 계획인 듯하다. 그간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불상을 바로 세우려는 공사 진척도는 매우 더디다. 경주시청 담당자는 '올해 바닥 지면 보강 공사를 마쳤고 내년에 불상 세우는 용역을 다시 의뢰할 예정'이라고 하니 특단의 대책이 없다면 열암곡 부처는 금생에 우리 곁에 오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마애불은 경주 남산이 불국토라는 것을 말해주는 유물이다. '마애(磨崖)'란 '암벽에 불상을 새긴다'는 뜻이다. 남산의 신령스러운 바위마다 새겨진 부처들. 중생이 힘들고 어려울 적마다 찾고 의지하는 불국토가 됐다. 바위에 부처를 새긴 것이 아니다. 바위 속에 숨어있는 부처를 모셔온 것이다. 이는 하늘의 신과 땅의 신이 바위 속에 혼재하면서 중생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그게 신라인의 염원이다.

남산에는 마애불이 많다. 상선암, 용장골, 천룡골, 칠불암, 신선암, 백운대, 약수골, 오상골, 윤을골, 탑골 등 골짜기마다 있다. 탑골에는 십여 불상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칠불암 마애칠불은 국보 312호다.

열암곡 마애불의 바윗덩어리 무게는 70~80t이 되지만 재질이 화강암으로 매우 단단해 5m 높이에서 떨어졌는데도 흠이 없다. 우주 저 너머로 탐사선을 보내고 100층 건물 짓고 바다 밑에 백 리 터널을 뚫고 세계 최고 조선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그동안 네 분 대통령을 거치고도 훤히 드러나 있는 바윗덩어리 하나 바로 세우지 못한다니 참으로 아쉽다.

격조 높은 마애불 1기가 오랫동안 사바세계를 굽어보다가 심심한 사연으로 다시 우리 곁에 다가와 함께한다는 것은 만 중생들의 기쁨이요 시절 인연이다. 열암곡 부처님! 어서 일어나십시오. 못된 코로나19가 우리 중생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땅에 엎어진 상태로 발견된 2007년 당시 경주 남산 열암곡 마애불의 전체 모습. 붉은색 원형점선 안이 얼굴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청와대 석불좌상
눈·코·입 또렷한 통일신라 미남불상
일제강점기 총독이 경주서 강탈해가
총독관저에 있다가 1990년 청와대로
원 봉안처, 삼국유사 속 이거사 추청

 

청와대 관저 뒤쪽 녹지원 보호각 안에 경주 석불좌상 한 점이 봉안돼 있다. 광배는 잃었고 대좌(臺座)는 상대만 남았으나 불신은 손상된 데가 거의 없다. 특히 얼굴은 눈동자뿐만 아니라 코와 입 모양이 그대로 살아 있다. 전체적 양감이 풍부한 통일신라시대의 빼어난 불상이다. 2018년 보물 1977호로 지정됐다. 청와대 불상 또는 청와대 미남불이라고 부르는데 일제강점기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경주에서 강탈해 간 유물이다.


이 미남불이 청와대 경내에 있게 된 연유는 이러하다. 데라우치 총독이 1912년 11월 경주로 순시 왔을 때 이 불상을 보고 관심을 가지자 당시 경주금융조합 이사였던 일본인 오히라 료조가 데라우치에게 이 불상을 상납하면서 불상은 경주를 떠나 서울 남산 왜성대 근처 총독관저로 가게 된다. 총독관저는 서울 남산 북쪽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인근에 있었다. 1913년 2월에 데라우치가 이 불상을 향해 배례하는 사진이 있다. 데라우치는 7년간 총독으로 군림하다가 1916년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한동안 이 불상은 세간의 뇌리에서 사라진다.

이후 17년이 지난 1934년 3월29일자 매일신보 기사에 다시 불상이 등장한다. '석가여래상의 미남석불, 풍우 참아가며 총독관저 큰 나무 아래 좌정, 오래 전 자취 감추었던 경주의 보물' 이라는 제목으로 활자화되면서 총독관저 미남석불로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1939년 미나미 총독이 북악산 기슭에 총독관저를 신축하고 이 불상을 남산 왜성대에서 북악산 총독관저로 가져갔다. 그 후 광복이 되고 총독관저는 경무대로 바뀌었고 제5공화국까지 그대로 있다가 1990년 대통령관저가 신축되면서 불상은 근거리인 현재 위치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3석조약사좌상
일제강점기 총독부가 임의로 가져간 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왼쪽).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경주 남산 삼릉계곡 암벽을 병풍삼아 정좌하고 있는 석조약사여래좌상의 옛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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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경주 남산 옛 절터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초대 총독 데라우치가 강탈해간 후 곡절끝에 청와대 녹지원에 봉안돼 있는 석불좌상. 2018년 보물 1977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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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원래 어디에 있었던 불상인가? 불상이 최초로 나오는 자료는 1917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인데 여기에는 경주 불상이라고만 하고 원래 봉안처에 대한 언급은 없다. 매일신보 기사에 '박물관 홀에 진열되어 있는 약사여래와 같은 경주 골짜기에 안치돼 있던 것'이라는 내용이 있어 경주 남산 삼릉계곡 불상으로 추정되지만 기사에 오류가 많아 원 봉안처에 대한 논란은 정리되지 못했다.

1939년 총독부 박물관장은 불상 하대석을 찾기 위해 직원을 경주로 보낸다.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불상은 경주 도지리 유덕사지에서 옮긴 것이고 대좌는 찾지 못했으며 폐탑·주춧돌 등이 폐사지에 흩어져 있다'고 적혀 있다. 그 후 많은 연구가들은 유덕사를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거사'로 밝혀냈고 불상의 원 봉안처도 바로 이거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폐사지인 이거사지는 시내에서 불국사로 가다가 만나는 통일전 삼거리 좌측에 있다.

◆데라우치의 만행

데라우치는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조슈번(현 야마구치) 출신의 군인 정치가다. 그는 1909년 5월 조선통감으로 와서 3개월 강압적인 정치공작으로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시키고 초대 총독이 된다. 국치일에 남산 왜성대에서 읊은 그의 시는 아직 우리를 분노케 한다. 그가 아니었다면 일제강점기가 더 짧아졌을지도 모른다. 7년간 총독으로 있으면서 우리 역사와 문화재에 많은 상처를 남겼다. 그 흔적 중 하나가 '데라우치 문고'이다. 그가 우리나라에서 약탈 반출해 간 고문헌이 1천여 종 1천500여 점. 그중 일부 98종 135책을 1996년 경남대박물관이 돌려받아 만든 문고다.

그는 헌병을 앞세운 무단 통치를 실시해 언론과 교육을 통제했다. 105인 사건을 조작해 애국지사를 투옥하고 신민회도 해체시켰다. 식민사관으로 우리 역사를 왜곡했으며 왕조실록과 의궤 등 국보를 반출하고 빼어난 우리 불상과 불탑류를 일본 정원의 장식물이 되게 했다.

그의 장남 데라우치 히사이치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남방군 총사령관이 되어 수많은 조선 청춘을 미얀마 임팔전투, 필리핀, 솔로몬군도 등 태평양 전선의 총알받이로 몰아넣었다. 대를 이어가며 조선을 유린한 집안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둔황 유물 일명 '오타니 컬렉션'도 1916년에 데라우치가 상납받은 유물이다. 패망하자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해 둔황 고문서 360여 종 1천500여 점이 고스란히 우리 박물관 소유가 됐다.

청와대 석불좌상에는 데라우치의 잔영이 어른거린다. 강탈의 흔적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뇌물 상납으로 집을 떠난 경주 불상을 이제는 옛집으로 돌려주고 데라우치의 흔적도 말끔히 지워야 한다.

◆국보 아닌 국보 약사여래불 삼릉계곡 석조약사여래좌상

삼릉계곡 암벽 병풍삼아 정좌하다
1915년 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져
광배·대좌 정교하고 온전한 국보급
국립박물관에 있지만 문화재는 아냐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경주 삼릉계곡에서 가져간 석조약사여래좌상 한 점이 있다. 광배와 대좌가 매우 아름답고 정교하며 온전하게 남아있는 빼어난 불상이다. 1915년 데라우치 총독이 합병 5주년을 과시하면서 조선물산공진회를 열고 총독부박물관을 만들 때 경주 남산에서 차출됐다. 일제강점기 내내 박물관 중앙에 우뚝하게 정좌해 우리 유물을 빛냈다.

원 봉안처는 최근에 얼굴과 광배를 보수한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보물666호)에서 40m 위쪽, 정상부 아래 암벽과 큰 바위 사이 자그마한 터에 정좌하고 있었다. 자연 암반을 초석으로 남산 바위를 법당으로 삼았던 부처다. 천년 세월 동안 사바세계를 굽어보며 중생을 어루만져주다가 서울로 가서 백 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암벽을 병풍 삼아 홀로 정좌하고 있는 옛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는데 원 봉안처에 안내문 하나라도 세웠으면 좋겠다.

삼릉계 약사여래불은 경주 외동의 감산사지에서 출토된 미륵보살상(국보 81호), 아미타불상(국보 82호)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의 대표 신라불상이다. 총독부박물관 시절부터 자랑한 국보급 불상이지만 어떤 연유인지 문화재로 등재되지 않았고 문화재 정보에도 나오지 않는다. 문화재가 아니니 문화재보호법 적용도 받지 않는다. 문화재청은 박물관에서 등재 신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고 박물관에서는 예부터 소장해 온 고유 유물이라고 하는 듯하다. 일제강점기에 경주 남산에서 임의로 가져간 국보급 불상의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도 문화재로 등재되어야 함이 마땅하지 않을까.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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