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대구 육개장~따로국밥 연대기(2)...걸쭉한 고추기름 넣고 끓인 '육개장'. 사골 육수에 선지 넣고 끓인 '따로국밥'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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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2-24   |  발행일 2021-12-24 제34면   |  수정 2022-01-24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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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노점 식당 전경. 그 시절 민초들의 식탁이 얼마나 초라했는가를 암시하는 길거리 한 편에 가마니를 둘러 벽을 삼고 송판을 테이블로 삼은 노변 주막형 장국밥집.

◆보신탕과 육개장 사이

1929년 12월1일 종합잡지 '별건곤(別乾坤)'. 필명을 달성인이라 불리는 저자가 이런 말을 한다. "대구탕반(大邱湯飯)은 본명이 육개장이다. 대체로 개고기를 한 별미로 보신지재(補身之材)로 좋아하는 것이 일부 조선사람들의 통성(通性)이지만 특히 남도지방 촌간(村間)에서는 사돈이 오면 개를 잡는다. 개장은 여간 큰 대접이 아니다. 이 개장 기호성(嗜好性)과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정까지 살피고 또는 요사이 점점 개가 귀해지는 기미를 엿보아서 생겨난 게 바로 육개장이다. 이는 소고기로 개장처럼 만든 것인데 시방은 대발전하여 본토인 대구에서 서울까지 진출을 하였다." 즉 육개장은 개장국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태생된 음식으로 소고기를 뜻하는 '육(肉)'과 보신탕을 의미하는 '개장'이 합쳐진 말로 서민들이 먹었던 '개장국'에서 유래한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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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시절의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음식점. 길에서 만난 식당은 주막 아니면 장터국밥 스타일이었고 고관대작은 훗날 요정으로 불리는 조선 갑종 요릿집·청요릿집(중화요릿집)을 애용했다.


예로부터 개장국이 꽤 인기가 있었던지 사찰의 스님들도 그 맛을 보기 위해 고기를 대신해 '고기나물'이라 불리는 눈개승마를 비롯해 마른나물과 버섯을 넣고 요리한 '채개장'을 만들었다. 삶은 닭을 결대로 찢어 만든 닭개장도 있다. 19세기 말엽에 편찬된 조리서 '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 육개장 만드는 법과 함께 '영계국'이라는 닭요리가 나오는데 육개장인 듯 언급되어 닭개장 역시 오래전부터 있었던 음식임을 확인할 수 있다. 시의전서에 나오는 육개장 만드는 법은 소고기의 여러 부위와 함께 특이하게 전복·해삼 등도 넣는다. 고기는 다지고 그 외 부분은 골패처럼 네모지게 썰어 넣는다. 식사로도 할 수 있지만 건육에 겨자를 쓰면 술안주로도 좋다고 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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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성당못 근처에 있었던 우시장 전경.


소고기가 귀하던 시절 우리 조상은 입맛을 잃고 원기가 떨어졌을 때 개고기를 먹고 원기를 회복했다. 한글로 된 최고의 고조리서 '음식디미방'(1670)에는 개장 고는 법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규합총서'(閨閤叢書·1809년)에 '개찜'이라 명명된 개장국이 설명돼 있다. 여기에서는 고추장을 처음 넣은 조리법이 소개된다. 이걸 보면 김치보다 앞서 고추를 개장국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고춧가루가 널리 퍼지면서 뒤늦게 매콤한 육개장이 등장하게 된다.

손정규의 '조선요리'(1940년)에는 고춧가루를 넣고 빨갛게 끓인 육개장의 조리법을 소개하고 있다. "양지머리와 사태를 소· 양 등과 함께 푹 삶아 건져내고 국물을 식혀서 기름을 걷어 낸다. 건져낸 고기는 결대로 찢거나 칼로 썰고 양도 저민다. 이 고기나 양을 진간장, 다진 파와 마늘, 참기름, 깨소금, 후춧가루 등으로 양념한다. 한편 고춧가루에 참기름을 끓여 넣어서 잘 개어 놓고 대파를 데쳐 놓는다. 이들을 끓어오르는 장국에 넣어 한소끔 끓여낸다." 이것이 서울식 육개장이다.

대구식 육개장의 별칭 '대구탕'
고기결이 풀릴 만큼 큼지막하게 썰어
손으로 비틀어 자른 대파 넣고 끓여
얼큰한 국물에 감칠맛·단맛 우러나와
삶은 닭을 결대로 찢어서 만든 닭개장
임란후 고춧가루 넣어 매콤한 육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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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개장국은 국민적 지탄을 받고 있지만 20년 전만 해도 대구·경북은 한국 보신탕 문화특구로 불릴 정도로 즐겨 먹었다. 일제강점기 개장국집 전경.


◆대구탕을 아시나요

일제 강점기에는 대구탕으로도 불렸던 대구탕반, 그리고 6·25전쟁을 거치면서 '따로국밥'이라는 국밥 형태의 음식이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음식학적으로 볼 때 대구탕은 생선 '대구탕(大口蕩)', 육개장의 별칭인 '대구탕(代狗蕩)', 그리고 대구식 육개장의 별칭인 '대구탕(大邱蕩)'이 있다.

19세기 말엽 대구 우시장은 번창했다. 1910년 당시 통감부에서 출판한 '한일합방 기념 대일본제국 조선사진첩'에는 대구시장(서문시장)과 우시장이 소개돼 있다. 대구 우시장은 지금의 대구 달서구 성당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1924년에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의 시장'에서는 1년에 2만마리 이상을 취급하는 최대 규모의 9개 축산시장을 기술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대구 우시장이다. 당시 2만마리 이상 거래되는 우시장 9개소 중 6개소는 북한에 있으며 남한은 대구 외 수원과 부산이었다고 한다. 2만 마리면 하루에 50마리 꼴이니 당시 소의 무게를 생각하면 대구에는 당시 하루 10t가량의 소고기가 풀렸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계로 대구의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소고기나 소의 내장을 사용한 음식들이 비교적 많을 수밖에 없었다.

대구에는 육개장 형태인 대구탕이 있다. 거기다가 따로국밥이라는 또 다른 음식이 있어 식도락가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같은 듯 다른 대구탕이라 불리는 육개장과 대구 명물 '따로국밥'은 재료나 조리학적으로 볼 때 전혀 다른 음식이다.

대구탕의 특징 중 하나는 붉고 걸쭉한 고추기름. 국이 끓을 때 고춧가루를 넣지 않고 녹인 소기름으로 고추기름을 만들어 양념으로 넣는다. 따로국밥은 육수를 사골로 만들고 거기에 선지까지 들어간다.

일제강점기 초기 경부철도 건설로 대구에 사람들이 모이고 시장이 선다. 이때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도 적잖았다. 덕분에 대구 명물 대구탕이 태어난다. 육개장은 '소고기+개장국'이다. 개장국 스타일로 끓인 쇠고깃국으로 시장통 등에서 팔던 주막 음식이었다.

육당 최남선도 '조선상식문답'에서 소설가 김동리도 대구가 한국 육개장의 명소란 점을 적시했다. 김동리는 직접 '대구탕'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서울의 전동 대구탕 집은 대구탕으로 시작해서 연계탕(연계백숙)과 구운 갈비를 메뉴에 추가해서 장사를 했는데, 그 뒤로는 같은 메뉴를 제공하는 식당들이 여러 곳 생기게 된다. 1896년 발행된 연세대 소장 '규곤요람'에서 소개하는 육개장도 대구탕에 가깝다.

1930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경성 시내 음식점 조합이 음식값을 내렸다'는 기사를 보면 육개장은 없고 대구탕반(대구탕)만 등장한다. 육개장이라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경성에서 육개장보다 대구탕이라는 이름이 더 흔히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풍연도 '서울 잡학사전'에서 육개장이 대구탕의 영향으로 전국으로 퍼졌다는 설을 내놓고 있다. 육개장은 서울에서 지역 특성상 더운 날이 많은 대구로 건너가면서 더욱 인기를 얻었다 보는 것이다.

대구탕은 소고기를 푹 끓여낸 얼큰한 국물로 다른 지역의 육개장과 달리 고기를 찢어서 넣는 게 아니라 고기의 결이 풀릴 정도로 큼지막하게 썰어 대파와 함께 걸쭉해질 때까지 끓여낸다. 특히 대파를 자를 때 칼을 대지 않고 손으로 비틀어 잘라 넣는다. 여기에 소량의 고구마 줄기나 무를 넣기도 하지만 소고기의 감칠맛과 대파에서 나오는 단맛이 맛의 핵심이다.

6·25 전쟁 후 향토음식 따로국밥
19C 전국 최대 규모 번창 대구우시장
소고기·내장 재료 대구대표 음식 발전
사골·양지머리 육수 쓰는 두가지 방식
경상도서 즐겨먹는 소고기국밥 스타일
1946년에 오픈한 대구 국일식당 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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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따로국밥과 비슷하지만 레시피가 사뭇 다른 중구 시장북로 미싱골목 옆 50년대식 골목·움집 같은 식당에서 반세기 이상 대구 스타일의 육개장인 대구탕 외길을 걷고 있는 옛집 육개장 골목길. 이춘호기자


◆따로국밥

대구를 따로국밥의 고장으로 만든 주인공은 1946년 오픈한 '국일식당'이다. 한국전쟁 이후 만들어진 따로국밥은 겉모습은 비슷해 보여도 다른 음식이다. 경상도 사람들이 즐겨 먹는 소고기 국밥에 더 가깝다. 따로국밥은 대구탕반과는 전혀 다른 해장국 스타일의 국밥에 가깝다.

'전통 육개장 스타일'은 옛집·온천골·진골목·벙글벙글, 선지가 들어가는 해장국 방식의 따로국밥은 국일·교동·한우장·한일 등이 명맥을 잇고, 우거지와 선지가 들어간 대덕식당은 '선지국'으로 분류된다.

육개장도 사골 육수를 베이스로 하는 쪽과 그렇지 않고 일반 반가의 소고깃국처럼 양지머리 육수를 갖고 국을 끓이는 두 방식이 있다.

경상도 일반 민가의 소고깃국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내는 식당은 경산 영남대 기숙사 근처에 본점이 있는 '온천골'. 여기는 양지머리, 대파와 무, 그리고 마늘 양념장만으로 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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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장 독특한 소고기 탕반문화를 가진 대구의 대표 음식 중 하나인 국일 따로국밥. 1946년 옛 한일극장 서편 공터에서 좌판 형태로 오픈했는데 6·25전쟁 때 숱한 피란민들의 추억이 스며든 곳이기도 하다. 대구의 따로국밥은 타지방의 육개장, 해장국, 장터국밥, 설렁탕, 곰탕 스타일이 한데 혼재된 것 같다. 반드시 선지가 사용되고 육수를 빼기 위해 사골을 밤새 고아낸다. 그리고 보조재료는 대파와 무, 고기는 양지머리를 사용한다. 그리고 콩팥 기름에 고춧가루를 섞은 고추기름을 흥건하게 올려주며, 마늘 양념이 빠지지 않아야 된다. 이춘호기자


◆팔도 별별 소고깃국

1920년대에 이미 대구탕이 유행했지만 지금도 팔도엔 이런저런 소고깃국이 남아있다.

대구권 가정식 소고깃국은 일명 '소고기무국'으로도 불린다. 경주에 가면 채 썬 묵이 들어가는 묵사발국 같은 '팔우정 해장국', 의령 종로식당의 육개장은 콩나물국 같다. 양평해장국은 소양을 베이스로 한 선지해장국 스타일이다.

서울과 충청도 지역에서는 고사리 등을 넣지 않고 많은 양의 파를 큼직하게 썰어 넣었기에 '파국'이라고도 한다. 같은 충청도 안이라도 지역에 따라 부추를 넣는 곳도 있다. 전라도에서는 소고기와 함께 대파와 달걀지단만 넣기도 하고 토란 대를 꼭 넣는 지역도 있다. 제주도는 '육=소고기' 하는 등식이 통하지 않는 지역이다. 대표적인 게 바로 '고사리육개장'이다. 육개장 역시 소고기가 아닌 돼지고기가 들어간다. 또 고사리의 형태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푹 끓이며, 걸쭉하게 하기 위해서 들깨·보릿가루를 넣는다. 재료들의 차이로 인해 다른 지역의 붉은색 육개장과 달리 황톳빛에 가깝다.

북한에도 육개장이 있는데 '소고깃국'이라고 말한다. 그 명칭만 다를 뿐 만드는 법은 육개장과 동일하다. 육개장은 기본적으로 밥과 함께 먹지만 면과 먹기도 한다. 강원도 지역에서는 메밀면이나 당면을 넣어 밥과 함께 나오기도 하며, '육개장 칼국수'라 하여 육개장에 칼국수를 넣어 '육칼'이라고도 한다. 대구의 경우 중구 종로 진골목식당에서는 육칼이라 하지 않고 '육국수'라 한다.

한국인이 자주 틀리는 맞춤법에 육개장이 꼭 들어간다. 실제로 식당에 가면 '육계장'이라 쓰여 있는 곳이 종종 보인다. 아마도 삼계탕(蔘鷄湯)의 '계'와 연관 지어 기억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제 육개장이 소고기로 만든 개장국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았으니 더이상 '육개장'을 잘못 쓰는 일은 없도록 하자.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 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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