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진의 문학 향기] 바람은 허공에 길을 낸다

  • 정만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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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2-11  |  수정 2022-02-11 08:06  |  발행일 2022-02-11 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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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진 (소설가)

1829년 2월11일 러시아 극작가 그리보예도프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단 한 권의 책만 남겼다. 네이버 지식백과 '러시아 문학사'도 "그리보예도프는 단 한 권의 책을 쓴 인물"이라는 표현으로 그를 소개하고 있다.

그 한 권의 책이 '지혜의 슬픔'이다. 이 희곡은 1829년 일부 초연되었지만, 전작 초연은 그의 사후인 1831년에야 이뤄졌다. 1822년 무렵에 집필된 '지혜의 슬픔'이 거의 10년이나 지나서야 전작 공연이 된 것은 상류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 때문이었다.

3년여 외국 유학을 마친 뒤 애인 소피아를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에 온 주인공 차츠키는 상류 인사들의 무지와 위선을 적나라하게 공격한다. (상류 귀족계급이 그런 내용의 '지혜의 슬픔'이 공연되도록 가만 놔둘 리 없었다.) 차츠키는 그 일로 말미암아 소피아에게까지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한다. 소피아의 아버지 파무소프는 고위관리로, 사람을 재산과 지위로만 평가하는 인물이다. 파무소프는 자신의 외딸 소피아를 부유한 자산가로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는 스칼로주바 대령과 결혼시키려고 한다. 소피아가 순순히 그렇게 혼인할 리가 없다. 심각한 갈등이 일어나지 않으면 소설도 희곡도 성립되지 않는다. 현실에는 오로지 순응만 하는 인물들도 허다하지만, 문학의 세계는 그래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플롯이 진행되는 서사가 있다면 독자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지혜의 슬픔'은 옛 애인 차츠키에 대한 신뢰를 잃은 소피아가 아버지의 비서이자 하급관리인 몰찰린을 사랑하는 것으로 갈등을 증폭시킨다. 다만 필자가 지금 이 글을 쓰는 데에는 '지혜의 슬픔'의 내용에 주안점이 있지 않다. 서두에 밝혔듯 그리보예도프가 단 한 권의 책만 남겼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을 따름이다.

많은 저서를 발간한 필자는 그리보예도프의 예를 보면서 스스로 그리고 공연히 자연을 지키는 나무만 훼손한 게 아닌가 하는 자책감을 느낀다. 근래에 알게 되었지만, 우리나라에는 첫 시집을 단 한 권만 묶어 소장하고 일반에는 공개하지 않은 시인이 있다. 정소슬 시인이다.

정소슬 시인은 "바람은 허공에다 길을 내며 간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허공, 그곳에다/ 이랑을 내고/ 씨앗 뿌리면서 간다"라고 노래했다. 그곳이 바로 예술가의 길이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 슬픈 예술가의 하늘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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