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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웅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
지난주에 국민 MC 송해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국민'이라는 단어가 헐값에 여기저기 사용되기도 하지만 송해 선생님이야말로 '국민'이란 수식어를 감당할 자격을 갖춘 인물이었다. 전국노래자랑에서 세 살짜리 아이부터 칠순 노인까지 함께 어울리던 모습, 무대에 들고 올라온 지역 특산물을 즐거이 시식하던 순간이 기억에 생생하건만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부고가 속보라는 이름으로 컴퓨터 화면에 등장하던 순간, 딱히 할 일 없이 여유롭던 일요일의 한 자락도 함께 사라진 듯했다. 비록 스스로 열성 시청자라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전국노래자랑은 내 일상의 일부였음을 새삼 깨닫는다. 송해 선생님은 서민의 친구였고 그 평범함 때문에 위대해진 희귀한 인물이다. 여느 위대한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송해 선생님도 인생을 통찰하는 여러 언어를 남겼다. 그 가운데에 "'땡'을 받아 보지 못하면 '딩동댕'의 정의를 모른다"라는 발언이 널리 회자되고 있다.
'땡'이나 '딩동댕'처럼 소리를 흉내 내는 표현을 의성어라고 부른다. 이들은 자연의 소리를 흉내 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어휘라고 알려져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 기원에 대한 논쟁에서 의성어의 존재는 플라톤의 손을 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플라톤은 언어와 그것이 가리키는 사물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련성이 있다고 보았다. 즉 자연에서 존재하는 사물의 본성이 그것의 이름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입장을 자연설이라고 부른다.
한편 관습설이라 일컬어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현대 언어학의 관점과 매우 유사하다. 언어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약속일 뿐이며 사물의 본성과 언어 사이에는 어떤 필연성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 입장에서 의성어를 설명할 방법은 없을까?
의외로 의성어가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흉내 낸 것이라는 주장에는 허점이 존재한다. 개가 짖는 소리를 표현한 의성어는 자연에서 왔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한국어에서는 '멍멍', 일본어에서는 '왕왕', 영어에서는 '바우와우'라고 표현된다. 각국의 개들은 정말 각각 다른 소리로 짖는 것일까?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의성어가 정말 자연의 소리의 본성을 담고 있다면 동일한 대상에 대한 각국의 의성어는 상당히 유사하거나 같아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근본적으로 언어가 사회적 약속에 해당함을 입증하는 예시이다. 그런데 '딩동댕'은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사용하는 의성어이다. 자연설의 승리인가? 아마도 그렇게 보기는 힘들 듯하다. '딩동'과 '딩동댕'은 영어와 접촉하기 시작한 후에 도입되어 사용되었다는 것이 정설이기 때문이다.
'딩동댕'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실로폰이나 차임벨이 울리는 소리"라는 정의와 더불어 "합격이나 정답을 알리는 소리"라는 정의가 함께 나온다. 비록 '땡'의 정의는 "작은 종 따위의 쇠붙이를 세게 칠 때 나는 소리"라고 나올 뿐이지만 우리는 안다. 합격은 '딩동댕'이고 불합격은 '땡'이라는 것을. 수많은 '땡'을 경험해 보아야 비로소 '딩동댕'의 진짜 가치를 알 수 있다. 좀 더 중요한 사실은 전국노래자랑의 진짜 주인공은 '딩동댕'이 아니라 '땡'이었다는 점이다.
송해 선생님은 스스로를 딴따라(이 역시 의성어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 예이다)라고 부르기를 즐겨 했다. 전국을 떠돌며 거리에서 공연을 하던 유랑극단 시대의 막내다운 자부심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대의 위대한 딴따라의 명복을 빕니다.
김진웅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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