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조선의 르네상스와 영남의 눈물(상)...만고 죄인이 영남서는 큰 스승으로 추앙, 조정과는 깊은 골

  •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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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7-01   |  발행일 2022-07-01 제35면   |  수정 2022-07-01 07:49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장기집권 기반
송시열 유언 소론·남인에 통한 남아
영남 남인의 중심인 '갈암 이현일'
율곡학설 비판, 노론관리 공적으로
인현왕후 모욕죄 68세에 유배 떠나
이인좌 난 진압에도 최선 다했지만
노론 조정에 반역향으로 취급 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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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주실마을 옥천종택. 〈영남일보 DB〉

임진병화가 끝나고 100여 년이 지난 영·정조 75년 치세는 나라 안팎이 안정되고 왕조 또한 부흥기를 맞이하여 '조선의 르네상스'라 부르기도 한다. 중국은 옹정·건륭제의 안정된 통치로 청의 전성기였고 일본 또한 에도막부 겐로쿠 시대를 거치면서 문화 융성기를 맞이해 동양 삼국은 오랜만에 평화를 구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영남 선비에게 경상도 900년사에서 가장 가혹한 세월이었다. 과거급제해도 당상관 보임은 하늘의 별 따기였고 7품 참하로 마치기 일쑤였다. 사신으로 나가 외국문물을 견문한 선비가 없었고 어사또 마패 차고 다른 지방을 돌아본 이도 없었다. 조령은 장벽이 됐고 조정에는 항상 '영남인'이란 꼬리표가 붙었다. 노론 조정과 영남 선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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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주실마을 옥천종택 초당. 〈영남일보 DB〉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장기집권 기반
송시열 유언 소론·남인에 통한 남아
영남 남인의 중심인 '갈암 이현일'
율곡학설 비판, 노론관리 공적으로
인현왕후 모욕죄 68세에 유배 떠나

이인좌 난 진압에도 최선 다했지만
노론 조정에 반역향으로 취급 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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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천정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한천팔경(寒泉八景)이 있는 이곳에 잠시 머물며 작은 정사를 짓고 학문을 연구하였는데, 후에 한천서원(寒泉書院)을 짓고 우암을 제사하다 고종 때(1868) 철거된 후 후학들이 다시 유림회를 결성, 한천정사(寒泉精舍)를 건립하였다. 한천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1칸 반)의 팔작기와집으로 중앙에 대청마루가 있고 양쪽으로 방이 설치되어 있으며 전면으로는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영남일보 DB〉



◆인조반정은 서인 친인척 거사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은 서인 친인척 거사이다. 반정 후 정사공신으로 녹훈된 53명 인물들은 모두 인조의 외조부인 구사맹과 혼인을 맺었거나 인척 관계다. 서인으로 좌찬성을 지낸 구사맹의 다섯째 딸이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훗날 원종으로 추존)과 혼인하여 인조를 낳았고 인조가 반정을 주도했다.

구사맹이라는 한 개인의 인맥이 연결돼 거사에 성공했고(다섯은 이탈) 중대한 시기에 공신으로 녹훈된 집안은 능성구씨를 비롯해 조선 후기 유력 집안으로 부상했다. 인조반정은 '물실국혼(勿失國婚·왕비는 우리 당파에서)'과 더불어 서인이 장기 집권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우암 송시열의 유언

1689년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남인은 제주에 유배 중인 83세 우암을 다시 불러들여 정읍에서 사사토록 하는데 이때 우암은 제자 권상하에게 유언으로 여덟 글자 '원통함을 품어도 어찌할 수가 없다(含忍痛 迫不得已)'를 전하며 뜻을 같이하는 선비에게 전수하여 잊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한다. 유언은 훗날 비장한 문구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사무친 통한이 가슴에 맺힌다(日暮途遠 至痛在心)'로 다듬어진다. 두 구절 모두 실록에 실려 있다.

제자들은 모화와 사대를 의미하는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만동을 따와 '만동묘'를 짓고 소론과 남인에 대한 통한을 가슴에 새긴다. 우암의 죽음은 9년 전 경신대출척에 사사된 남인 허적·윤휴·오시수의 죽음과 영남 출신 이조판서 귀암 이원정의 장살에 대한 보복이었다. 두 집단 싸움에는 이미 군자의 도(道)가 사라지고 선혈만이 낭자했다.

◆갑술년 패배와 유배

송시열이 사사되고 5년 뒤에 일어난 갑술환국(1694년)은 영남 남인이 역사적으로 피 흘린 마지막 사건이었다. 이조판서로 있던 갈암 이현일은 함경도 종성, 이조참판이던 칠곡의 이담명은 평안도 창성, 대사성이던 안동 내앞의 지촌 김방걸은 전라도 화순으로 유배돼 배소에서 세상을 떠나고 강원 감사였던 봉화 바래미의 팔오헌 김성구는 낙향한다.

영남 남인의 중심은 갈암이었다. 갈암은 영남 산림(山林)으로 51세에 출사하여 숙종의 총애를 받았고 율곡의 학설을 강하게 비판하여 노론 관리들의 공적이 된다. 기사환국으로 민비가 폐서인이 되자 갈암은 성균관 좨주로 있으면서 비록 폐비가 됐지만 인륜 상 궁궐 내 별궁에 모셔야 한다고 상소를 올리는데 상소문에 '폐비 민씨는 궁중의 법도를 지키지 않아 스스로 하늘을 끊었으니(自絶于天) 다시 의논할 수 없으나…'라는 구절이 있는데 '스스로 하늘을 끊었다'는 네 글자 '자절우천'이 훗날 문제가 된다.

갑술환국으로 노론이 정권을 잡고 민비가 인현왕후로 복위되자 우리 국모 인현성모를 임금을 버린 나쁜 여인으로 모욕했다고 갈암을 강상죄인(綱常·삼강오상)·명의죄인(名義·명분의리)으로 낙인찍어 68세에 함경도로 귀양 보낸다. 하지만 유배지 함경도 종성, 이배 된 전라도 광양, 방축향리지 안동 금소에는 명성을 듣고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온 선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제자 명부인 금양급문록에 수록된 인물이 300명 넘으니 숙종·영조 때 영남 선비는 대부분 그의 제자이다. 조정은 만고 죄인으로 취급하고 영남에서는 큰 스승으로 숭앙하니 두 골의 간극은 깊을 대로 깊어졌다.

이후 재령이씨 문중은 과거급제자를 한 사람도 배출하지 못했고 관작은 왕조가 망하면서 회복됐다. 음식디미방을 지은 정부인 안동장씨 장계향이 그의 모친이고 삼백 년을 굳건히 지키던 갈암종택은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자 선대 향리인 영덕 영해로 이건했다.

◆영남 소모사의 비극

1728년 영조 4년에 일어난 이인좌 난에 영남 우도가 적극적으로 가담하자 조정은 소론의 오명항을 순무사, 박문수를 종사관으로 급파하면서 영남 인물을 소모사(召募使·의병모집 임시벼슬)로 내려보내야 하는데 조정에는 영남 인재의 씨가 말라버렸다.

어쩔 수 없이 제주 목사를 마치고 영천 금호강변에 30년 은거하고 있던 76세 병와 이형상을 가의대부로 승진시키고, 영양 주실의 71세 옥천 조덕린을 통정대부로 승진 시켜 소모사로 임명했다. 그리고 막 당상관으로 승진해 종성부사로 임지에 가는 상주의 화재 황익재를 수원에서 만나 조정에 장계를 올려 소모사로 데리고 간다.

난이 진압되고 반역자 심문에서 병와와 화재의 이름이 나왔다고 연루자로 엮는다. 병와는 서울로 압송돼 국문을 받고 곧 무고함이 밝혀졌으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영천에 내려가지 못하고 인천에서 세상을 떠나고, 화재는 노론의 무고로 억울하게 평안도 구성으로 유배 가서 7년 귀양살이를 한다. 옥천은 수년 전에 올린 정명론 상소가 이인좌 난을 부추겼다고 훗날 제주 정의현으로 유배 가다가 전라도 강진에서 세상을 떠났다. 영남 소모사들은 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모집하여 난의 진압에 최선을 다했건만 노론 조정은 그들을 버렸고 영남을 반역향으로 취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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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 조선후기 승정원(국왕비서싷)에서 작성한 일기식 업무일지. 인조(1623년)부터 순조4년(1910년)까지 수록돼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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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 태종(1392년)부터 철종(1863년)까지 25대 472년간 왕조 역사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제 강점기 별도 편찬. 태백산, 정족산, 오대산, 적상산 사고본이 있으며 국보 151호 태백산사고본임. 〈문화재청 제공〉


◆옥천 조덕린의 정명론

1725년 영조 1년에 옥천 조덕린은 사간원 사간을 사직하면서 시무10조소 일명 '정명론(正名論)' 상소를 올린다. 상소문에는 당쟁의 폐해를 강조하는 내용이 있어 노론 조정은 그를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보낸다. 스승 갈암이 30년 전에 귀양 갔던 삼천리유배지에 제자가 다시 70세에 귀양 가서 2년 살았다.

정명론은 공자의 학설로 '바른 정치를 하려면 국왕은 국왕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부모는 부모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왕권이론으로 동양정치사상의 큰 뿌리였다. 왕조 교체, 신분 귀천의 이론적 근거이기도 했다.

이인좌 난이 일어나자 정명론이 반란의 단초가 됐다며 처벌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이미 한번 벌을 받았으므로 영조는 윤허하지 않았고 10년 뒤 다른 상소 사건에 정명론이 다시 불거져 80세 나이에 제주로 유배된다.

이후 바른 정치를 들먹일 적마다 옥천의 정명론이 언급됐고 옥천의 이름은 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수백회 나온다. 정명론 상소는 빼어난 명문장으로 조선 시대 최고의 시무소 중 하나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에도 가슴에 와 닿으며 승정원일기에 전문이 수록돼 있다.

옥천의 외증손이자 임청각의 풍류주인 허주 이종악이 행초체로 유려하게 쓴 서첩 '옥천 선생 십조소 허주부군수필'이 정명론 서첩이다.

사후에도 오랫동안 신원 되지 않고 있다가 1788년 정조의 무신창의 재조명 때 화재 황익재와 함께 풀렸으나 순조초 정순왕후 섭정 시절에 다시 죄인으로 묶인다. 손자와 증손이 과거급제했으나 노론 세력은 죄인의 후손이라 관직삭탈을 주장했고 순조는 맹자의 택참(澤斬·'선대의 일은 후손에게 영향이 미치지 않는다'는 논리)을 언급하며 삭직 하지 않았다. 1899년 고종 때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면서 사도세자 설원소를 쓴 봉화의 이도현 부자와 함께 신원 됐다.

옥천종택이 있는 영양 한양조씨 주실마을은 근·현대 우리 학계에 큰 인물이 많이 나왔기로 유명하고 후손 조지훈의 '지조론'은 옥천의 절의와 무관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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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산 김성탁의 갈암 신원소

제산 김성탁은 안동 내앞마을 출신이다. 영조는 이인좌 난으로 어려워진 영남을 달래기 위해 경상감사 박문수, 조현명에게 영남 인물을 천거토록 했는데 모두가 제산을 추천했다. 영조는 조정으로 불러 친견하고 시국책을 듣고 흡족하며 사축서 별제로 특채했다. 이듬해 1735년 증광시에 제산은 을과1위로 급제한다.

영조는 오랜만에 인재를 얻었다고 특별히 시를 지어 내렸는데 신임이 가득하다. '어제는 영남에서 추천한 인물이더니 오늘은 머리 위에 계수나무 꽃이 새롭도다. 어찌 그대 어버이만을 기쁘게 하랴. 나의 금마문(金馬門)에 학사 신하가 됐도다.' 과거급제 3일 만에 정5품 대간직 사헌부 지평으로 보임해 노론 조정이 술렁거렸다.

2년 후 교리가 된 제산은 영조의 신임을 얻었다고 믿었고 스승 갈암의 사건이 일어난 지 40년이 지났으므로 스승의 신원소를 올린다. 그러나 노론의 벌떼 같은 상소와 영조의 노여움으로 제산은 제주로 유배됐고 이듬해 전라 광양으로 이배 되지만 결국 풀려나지 못한 채 9년 만에 배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옥천이 세상을 떠나고 제산이 유배당한 영조 13년 1737년부터 영남과 조정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노론 수령을 앞세운 압력이 갈수록 더했지만 유가(儒家)에는 '금부도사가 3년마다 한 번씩 드나들어야 진정한 선비집안'이라고 자신들을 달랬다. (다음 호 계속)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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