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프랑스 아를(Arles)<상>고대 로마 유적이 즐비한 고흐의 도시 '아를'

  • 권응상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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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9-23   |  발행일 2022-09-23 제36면   |  수정 2022-09-23 09:12
광장
아를의 오벨리스크 광장.
프로방스에는 별처럼 반짝이는 도시가 많다. 교황의 유수 시절 교황청이 있었던 아비뇽, 프랑스 영화의 탄생지이자 프랑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마르세유, 로마 시대 수도교 '퐁뒤가르'와 신전 '메종 카레'로 유명한 님, 인구의 30%가 대학생이라는 대학도시 몽펠리에 등 쟁쟁한 프로방스 도시 틈새에서 자꾸 눈길이 가는 도시가 아를이다. 유별난 자랑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흐의 이름이 빛나고 있어서이다. 내가 아를이라는 도시를 알게 된 것도 고흐 덕분이었다. 고흐의 대표작 대부분이 이곳 아를에서 탄생했다. 알퐁스 도데의 희곡 '아를의 여인'과 조르주 비제의 동명 가곡도 귀에 익은 것을 보면, 문학예술의 자양분이 엄청난 도시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기원전 6세기부터 쌓여온 이 도시의 문화 퇴적층 덕분일 것이다. 아를은 이처럼 가봐야 할 이유가 많은 도시이다.

그리스인들이 세운 작은 곳, 무역항으로 번영
20m 높이의 '오벨리스크 광장'은 도시의 상징
로마네스크 양식 '지하 회랑' 가장 오래된 건축물
광장 동편의 최초 석조 극장 '고대극장'도 눈길
고대 오락장소 '원형경기장' 현재 투우축제 열려
오벨리스크·고대극장 등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님에서 퐁뒤가르를 보고 곧장 아를로 향했다. 아를은 님에서 동남쪽으로 25㎞ 정도 떨어진, 인구 5만이 조금 넘는 작은 도시이다. 몽펠리에와 마르세유를 지중해 동서 기점으로 하여 님, 아비뇽, 엑상프로방스 등의 굵직한 도시가 부채처럼 두르고 있다.

대성당
오벨리스크 광장의 생트로핌 대성당.
아를은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인이 세운 작은 도시로 출발하여 로마 시대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론강 하류를 끼고 있는 이 도시는 물류의 중심지였다. 운하로 해안과 연결되어 론강과 지중해를 항행하는 선박들이 이곳에서 화물을 바꿔 실었다. 당연히 육상교통에서도 프로방스 지역의 중심지가 되어 5세기 전후에는 오리엔트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다양한 산물이 모여들었다. 4세기 말에는 갈리아주의 주도로서 대주교구가 설치되고 공의회의 개최지가 되었다. 8세기에서 13세기까지 아를왕국이라 불린 부르군토 제2 왕국을 비롯하여 프랑스 남부에 존속했던 여러 왕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중세에도 무역항으로서 번영하였다. 16세기 무렵 론강 하구에 토사가 퇴적되어 물류 기능이 저하되면서 상권이 마르세유로 넘어갔고 아를도 쇠퇴하게 되었다. 시가지에는 고대의 성벽 자리를 나타내는 고리 모양의 도로가 나 있고, 로마의 고대극장, 지하 회랑, 원형경기장, 목욕탕, 수도(水道), 지하 묘지 알리스캉, 생트로핌 대성당 등 오랜 도시역사만큼 고대와 중세시대의 유적이 풍부하다.

아를 여행은 도시의 중심 오벨리스크 광장에서 시작했다. 광장 중앙의 오벨리스크는 아를 고대극장, 원형경기장과 더불어 1981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건축물이다. 4세기경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세워진 오벨리스크는 두 동강 나는 등 수난의 역사를 겪다가 루이 14세에 의해서 현재의 자리에 배치되었다. 기단을 포함해서 약 20m 높이로서 현재 이 도시의 상징이 되고 있다.

이 광장 주위로 로마 시대의 주요 건축물이 모여 있다. 광장 북쪽의 시청사 지하에는 고대 로마광장(포럼)의 토대로 사용했던 지하 회랑이 있다. 지하 회랑은 고대극장과 함께 기원전 1세기에 지어진 아를의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U자 모양의 회랑은 원통형의 아치 천장으로 덮인 이중 복도 3개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은 통로에 나뒹구는 돌조각의 화려한 조각을 통하여 당시의 영화를 짐작할 뿐이지만, 이곳은 로마 시대 아를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대표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극장
아를의 고대극장.
이 광장의 대표적인 중세 건축물은 생트로핌 대성당이다.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이 성당은 고대극장의 일부를 떼어내 지었고, 아를에 가톨릭을 전파한 트로핌 주교의 이름을 붙였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 있어서 중세 때 순례자들이 거쳐 갔던 곳이라고 한다. 성당 회랑 기둥머리에는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아름답게 조각하였다. 특히 현관 중앙문에 '최후의 심판'을 표현한 세밀한 부조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광장 동쪽으로는 로마 시대의 고대극장과 원형경기장이 있다. 아를 고대극장은 기원전 1세기경에 지어진 최초의 석조 극장이다. 무대와 반원형의 관객석이 있었지만, 지금은 원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당시의 무대 벽은 현재 두 개의 기둥만이 남아있고, 관객석도 일부만 남았다. 하지만 관객석이 102m나 되어 1만명 가까운 관객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큰 규모였다. 무대 뒤쪽에는 이 부근에서 발견된 로마인의 건설 흔적을 보여주는 돌무더기들이 쌓여 있었다. 이것으로도 로마 시대 이 도시의 융성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특히 이곳에서 발견된 '아를의 비너스'는 루브르 박물관의 명물인 '밀로의 비너스'에 필적할 정도로 아름답고 정교하다고 평가받는다. 이곳은 지금도 여름철만 되면 국제 사진전, 페플럼 영화제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고대극장 북쪽의 아를 원형경기장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도시의 벽을 허물고 지었다.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영향을 받은 건축물로 높이 21m, 길이 136m에 2만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이다. 검투사들이 서로 겨루거나, 맹수들이 싸우는 것을 보고 즐겼던 로마인의 오락 장소이다. 로마 시대가 끝난 6세기 말에는 이 경기장 안에 예배당 2개와 주택 212채가 들어서서 원래의 기능과 모습을 잃어버렸다. 유적지로 지정된 1825년에 이 주택들을 철거하고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경기장 꼭대기에 올라가면 아를의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원형경기장
아를 원형경기장.
지금은 이곳에서 매년 4월과 9월 축제 때 전통 투우 경기가 벌어진다. 아를에서 열리는 투우 경기는 스페인처럼 소를 죽이는 방식이 아니다. 투우사들이 크로쉐라는 날카로운 빗을 이용해 소의 뿔에 매달린 리본을 끊어내는 경기이다.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는 이 경기장을 배경으로 '아를의 여인'이라는 극을 썼다. 프로방스 지역에 사는 시골 청년이 이곳 원형경기장에서 투우 경기를 보다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 뒤 벌어지는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프로방스의 부유한 청년 농부 프레데리는 아를의 투우를 구경하러 왔다가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프레데리 집안의 사람들은 그 여인의 과거를 이유로 둘의 사이를 완강히 반대한다. 게다가 목장 지기 미티피오가 찾아와 자신이 그 여인의 애인이라며 둘의 결혼을 방해한다. 그는 결국 사랑을 지키지 못하고 자신을 사모하는 어린 시절의 친구 비베트와 약혼하게 된다. 프레데리는 결혼식 전날 밤 벌어진 축하 파티에서 춤추는 아를의 그 여인을 다시 보게 되었고, 애끓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곡물창고의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만다.

비극적인 이 희곡은 안타깝게도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 호평을 얻지 못하고, 21회 상연을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 희곡은 조르주 비제의 모음곡 덕분에 지금도 자주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비제는 공연이 끝난 후에 27곡 중 4곡을 추려 제1 모음곡으로 구성하였고, 비제가 죽은 후 다시 4곡을 추려 제2 모음곡으로 구성하였다. 이것이 현재 알려진 모음곡 '아를의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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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데의 희곡과 아를의 역사 유적은 고흐에게도 깊은 영감을 주었다. 고흐는 '아를의 여인'에 영감을 받아 '알퐁스 도데의 풍차 방앗간'을 2점, '아를의 여인'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7점이나 남겼다. 원형경기장 입구에 반 고흐 '아를의 원형경기장' 그림 패널이 있다. 이 그림은 투우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의 모습이다. 또 고흐의 '주아브 병사'라는 그림은 도데의 '타라스콩의 타르타랭'이라는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이다. 이 소설은 '타르타랭'이라는 이름을 가진 병사가 아프리카 알제리로 사자를 잡으러 떠나는 모험소설이다. 타라스콩은 아를 북쪽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아를의 역사 유적은 이렇게 예술가들의 영감을 일깨웠다. 고대극장과 지하 회랑, 원형경기장 등의 고대 유적과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의 목욕탕과 묘지, 그리고 12세기 생트로핌 대성당 등의 중세 유적들이 현대의 문명과 함께 조화를 이룬 아를의 독특한 문화 지형이 만들어낸 힘이다. 고흐가 대도시 마르세유를 포기하고 이곳에 정착한 이유일 것이다. 이처럼 아를은 고흐만 떠올릴 수 없는 너무나 깊은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었다.<계속>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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